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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최전선에서 전하는 <선생님 생존기>

공범이자 조력자, 노동자와 교육자 그 경계 어딘가에서

by 고시포비아 Mar 06. 2025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그간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일에 뛰어들었다.

고등학생 때 못 놀았던 것에 한이 맺혔는지 해가 지면 동기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낮에는 과외와 학원 수업을 뛰었다.


그럼 공부는 언제 했냐고?

부끄럽게도 대학 공부는 뒷전이었다.


공무원이신 아빠를 존경하는 마음에 나도 공직에 진출하고자 행정학과에 진학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무원이 되려면 공무원 시험만 잘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무원 시험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결심하고,

당장은 돈이 필요했던 새내기는 그렇게 사교육의 역군이 되었다.



당시 1시간 수업에 5만원을 받고 고등학생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과외학생의 집은 방이 1개였다. 하나뿐인 방을 자식의 공부방으로 꾸며놓은 것을 보고, 나는 마치 우리집에 온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학생 어머니는 수업할 때 방문을 열어놓을 것을 요구하셨다. 수업이 시작되면 학생 어머니는 부엌 너머에 있는 거실에 앉아 수업을 함께 듣었다. 내 영어 발음과 가르치는 내용, 딸아이의 반응을 하나하나 체크하신 후에 수업이 끝나면 내게 피드백을 주셨다. '여기서 이 문제는 천천히 알려주시는게 좋을 것 같다' '영어 톤을 이렇게 바꿔서 지도해달라' '영어 공부 방법에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참고해달라' 등등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이 정도면 직접 가르치셔도 될텐데,
굳이 과외 선생님을 고용한 이유는 뭘까?


숨이 막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과외를 받는 학생 역시 문 밖의 엄마를 의식해서 수업 중 말을 편하게 하지 못했다. 나와 학생은 결국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야 그만두면 여기서 나갈 수 있지만, 저 친구는 오랜 시간 저 숨막히는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과외 플랫폼을 통해 한 어머니가 연락을 주셨다. 형제가 같이 논술 과외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 전에 어머니가 직접 수업을 참관하시겠다고 했다. 형은 재수생, 동생은 고3이었다. 나는 카페에서 과외 어머니와 학생들과 마주앉아 시범 수업을 시작했다. 


"이 두 개의 제시문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학생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턱짓을 하며 메모한 내용을 펜으로 가리켰다. 학생이 대답을 못하니 어머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대신 답변을 했다. 답변 뒤에는 "얘가 이래요."라며 멋쩍은듯이 한말씀 덧붙이셨다.


이후 1년간 스터디룸을 빌려 매주 논술 수업을 했다. 글을 직접 쓰면서 배워야 했기에 수업은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수업이 끝나면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두 아이에 대한 고민, 논술전형에 대한 걱정과 불안, 오늘 수업내용에 대한 궁금증 등 푸념 섞인 말씀이 이어졌고 나는 위로와 응원을 전했다. 상담전화까지 마치고 나서야 그날의 과외 수업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때론 내가 학생을 가르치는 건지,
학부모를 가르치는 건지 헷갈렸다.




수능이 끝나고 논술 시즌이 되면 대치동에는 대규모의 '논술 공장'이 가동된다. 약 열흘 간의 '극성수기'를 대치동 사교육 시장이 놓칠리가 없다. 논술 학원에서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대형 강의실을 빌려 너도나도 '파이널 강의'를 열었다. 학생들은 교실 안에 설치된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 멀리 손바닥 크기로 보이는 강사를 희망의 등대 삼아 벼락치기로 글을 써냈다.


논술 첨삭을 위해 차출되었던 나는, 할당된 부스 안에 들어가 한 학생당 15분 내외로 폭풍 첨삭을 했다. 빠듯한 논술 입시 일정에 맞춰 첨삭행렬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앞에서 첨삭이 늦어지면 그 부스에 줄을 선 학생들은 다함께 귀가가 늦어졌기에, 2000자를 넘어가는 답안지일지라도 첨삭시간은 칼같이 지켜졌다.


온라인으로 일감을 받기도 했는데, 학생이 첨삭 1번당 3만원을 내면 그 중 만원을 내가 가져가는 식이었다. 첨삭 건수에 따라 비용받았기 때문에 첨삭 선생님들은 기계처럼 첨삭 답지를 찍어냈고, 우리는 이것을 소위 '꿀알바'라 불렀다.


수능을 망친 학생들의 마지막 희망, 논술전형은
사교육의 가장 기름지고 먹기 편한 부위였다.



강남, 특히 반포에는 꿀알바가 많았다. 수능 준비로 바쁜 최상위권 학생의 생기부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대회 발표자료를 보조해 주는 단기 과외를 한 적이 있다. 수업을 2번 했을 때쯤이었나, 카페에서 학생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입구에 멈춰선 벤츠에서 아버님이 내리셨다. 나를 슥 보시더니 돈봉투를 건네고 가셨다. 내가 여태 받아본 것 중 가장 두꺼운 돈봉투였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과외학생에게 커피를 쏘려 했지만, 엄마 카드가 있다며 차분하게 거절당했다. 빨리 수업이나 하자는 무언의 뉘앙스가 느껴져서 나는 냉큼 돈값을 하기 위해 과외 노하우를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는지 대면하는 수업은 점점 줄었고, 결국은 원격으로 자료만 만들어서 넘겨주는 신세가 되었었다.



'자기주도식' 교육방식을 표방한 학원도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이 1:3으로 팀을 이루어, 학생 3명이 삼각형 구도로 앉아 자습을 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바퀴달린 의자로 그 가운데를 돌면서 한명씩 수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한 학생당 5분씩 총 3바퀴를 돌아야 했다. 한 바퀴 도는데 15분이 걸리니, 도합 45분간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다.


5분이 지나면 교실에서 삐빅하고 알람음이 울렸다. 선생님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거나 일찍 끝내지 못하도록, 교실 뒤에 매니저가 상주하며 선생님들을 감시했다. 수업이 끝나면 가르친 내용을 수업노트에 자세히 적어 매니저에게 제출했다. 매니저는 수업노트마다 코멘트를 달아 다시 원장에게 제출했다. 미흡한 점이 있으면 원장은 매니저를, 매니저는 다시 알바강사를 불러 빨간펜으로 보완하도록 했다.


한 세션이 끝나면 15분간 쉬는 시간이 주어졌고, 정각이 되면 바로 다음 세션이 시작되었다. 당시 시급이 2만원이었는데, 쉬는시간은 업무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실제 시간당 받는 금액은 1만 5천원이었다. 방학에는 하루에 총 4개의 세션을 할 수 있었다. 열 두바퀴를 뱅글뱅글 세모낳게 돌아 12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난 뒤, 6만원의 거금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진이 빠졌던 것 같다.


학원 선생이 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선생조차 그저 돈 받는 부품에 불과함을 체감했다.




나는 미뤄두었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다음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아직 대학을 마치지 못한 터라 공무원 임용을 유예하고 학교에 복학했다. 복학생이라 그런지 그 전처럼 치열하게 일하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취업까지 된 마당에 학교 수업을 들을리는 만무했다. 나는 그 타협점으로 작은 동네 학원을 선택했다.


그곳은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이 다니는 곳이었는데, 학생을 다 합쳐도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치동에 비하면 학구열도 그다지 높지 않은 지역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중고등학생을 수업하시는 동안 나는 초등학생들 숙제를 봐주면서 놀아주는 역할을 했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갈 곳 없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수업이 끝나고도 갈 곳 없었던 나는 묘하게 잘 맞는 구석이 있었더랬다. 가끔 원장쌤이 못오시는 날에는 다같이 몰래 떡볶이를 먹으러 나가곤 했다.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때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버려 연락도 없이 학원에 늦은 적이 있다. 급하게 도착해 교실 문을 열자, 원장님과 꼬마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이라며 달려와 나를 안아주는 아이들, 다행이라며 따뜻하게 챙겨주시던 원장님. 그 순수한 온기 속에서 느낀 안도감과 감사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공무원 연수를 받기 위해 정들었던 학원을 그만두어야 했던 날, 아이들의 울음보에 미안하게도 참 많은 위안을 받았더랬다. 마침 대학 후배 중에 근처에서 알바를 구하던 친구가 있어 후임으로 소개해 주었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나의 마지막 학원 생활은 마무리되었다.



대치동에서 학생으로서 공부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사교육의 여러 단면들. 나는 때로는 부모들의 욕심과 아이들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사교육 시장의 공범이 되었다가도, 컨베이어 벨트 위의 지식노동자로서 그저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진정 전달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결국 잠시 머물다 떠났지만, 여전히 굳건한 사교육 시장 앞에서 나는 또다시 물음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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