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빠 이야기
아빠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신 분이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세상의 시선과 규칙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수능이 끝나고 정시 배치표를 방에 한가득 깔아놓고 대학 지원전략에 대해 엄마와 논의하고 있을 때였나. 아빠가 "전문대가 실용적이고 좋겠네!"라며 해맑게 말씀하시다가 방에서 쫒겨나셨던 날이 생각난다.
엄마가 한창 대치동 입시에 불타오르고 있을 시절, 아빠는 엄마가 없을 때면 몰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OO야, 대학은 진짜 아무데도 쓸모없어. 아빠도 대학 다녀봤지만 배우는 건 하나도 없더라." 대학입시에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다는 위로였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아빠처럼 공무원 하면 돼"
아침잠이 없으셨던 아빠는 내가 주말에 늦잠을 자고 있으면, 새벽같이 침대맡에 오셔서 빨리 산책을 가자는 재촉과 함께 공무원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 내가 꼭 공무원을 하면 좋겠다며 한참을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조금은 편협한 시각으로 일찍 깨닫게 되었다. 대학은 집안의 간판이고, 실속은 취업에 있구나! 그렇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른들의 생각을 쉽게 흡수한다. 한번 목표를 세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리는 성격이었던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장래희망을 '공무원'으로 적어서 내었다. 가끔 경찰관이나 군인, 검사처럼 변주는 있었지만, 특정직이냐 일반직이냐 정도의 오차만 있었고 대부분 공무원의 범주 내였다.
검찰 수사관으로 일하시던 아빠는 '형법 빠꾸미'셨다. 내가 아빠의 일에 관심을 보이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작위와 부작위, 범죄의 구성요건에 대해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새로 산 노트에 부자귀..라 썼다 지우고 부작위라 고쳐썼다. 위법성 조각사유의 5종류까지 야무지게 따라적고는 복습을 하러 노트를 학교에 가져갔었다. 옆자리에 앉은 짝꿍이 내 노트를 보고는 질겁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걸 배우는게 일반적이지는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아빠는 독특한 방식으로 나름의 교육열이 있으셨다. 엄마가 대학교라는 정답지를 갖고 계셨다면, 아빠는 진로에 있어서 가업(家業)이나 마찬가지인 '공무원'이라는 정답지가 있으셨다. 가업이라기에는 아빠가 1대셨지만 말이다.
수능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아빠 손을 잡고 노량진 고시촌 거리를 찾았다. 고시서점에는 공무원 수험서가 한가득이었다. 아빠는 9급 공무원 국어책과 영어책을 사주셨다. 3900원짜리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며 제2의 수험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했다.
집에 와서 수험서를 살펴보니 태어나서 처음보는 사자성어와 영어 단어가 한가득이었다. '수능은 양반이었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외우는 것을 정말 못했어서, 암기가 필요한 9급 공무원 시험은 공부 자체가 너무나 괴로울 것 같다고 판단했다. 반면 5급 공무원 시험은 암기가 전혀 필요없는 PSAT 시험과 비교적 내가 자신 있는 논술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차라리 5급 시험을 준비하는 게 승산은 적더라도, 공부 자체는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행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공무원 시험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진입했고, 아빠는 집에서 학원까지 매번 차로 태워다 주셨다.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아빠한테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시험을 보는 날이면 아침 일찍 아빠 차로 시험장에 도착했다. 혹시 컴퓨터 싸인펜이나 수험표라도 놓고 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셨는지, 아빠는 시험이 시작되고도 시험장 학교 밖에서 한참을 대기하곤 하셨다.
아침부터 오후 5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1차 PSAT 시험, 약 4일간 치러지는 2차 논술 시험, 그리고 마지막 3차 면접까지, 엄마와 아빠가 대동하며 온 가족이 함께 시험을 치르러 다녔더랬다. 다 커서까지 엄마 아빠 덕을 보며 다닌 것이 다소 민망하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그것이 제법 긴장감 넘치는 가족 이벤트처럼 여겨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기한 게, 공무원 시험 준비는 대학 입시에 비해 그다지 괴롭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았었고, 오히려 그 과정이 재밌었다.
아빠는 방향을 제시해주시긴 했지만, '이거 떨어지면 안돼'라던가 '꼭 합격해야 해'라는 식의 결과에 대한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응원에서는 딸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란 아빠의 믿음과 진심이 느껴졌었다. 내가 잘 안되는 결과에 대해 괴로워할 때는, 마치 걸음마를 떼다 넘어지고 우는 아이를 바라보듯, 지나고 나면 별 일아닌걸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기특하고 웃기다며 다독여주셨다.
엄마 역시 대학 이후로는 크게 압박을 주시는 일 없이, 내 공무원 수험 준비에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가끔 '그럴거면 접어라' 라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것이 엄마식의 응원방식임을 이제는 잘 알 수 있었다. 신림동 고시원에 살 때, 가끔씩 엄마가 놀러오셔서 함께 먹었던 칼국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뿌리 없이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으랴. 부모님의 정성을 딛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염불을 외던 공무원이 되어 자립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공무원이 뭐 그리 특별한 직업이겠냐만은, 그당시의 나에게는 여러모로 간절했던 꿈이었다.
불안해 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켜봐주는 아빠의 모습은, 내 문제를 내가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과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회사에 가고 나서도 아빠에게 크고 작은 문제를 상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세종으로 이사를 했을 때 아빠도 마침 청주로 발령이 나셨다. 이후 매주 주말마다 아빠를 만나, 엄마가 계신 서울의 집으로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함께 올라오곤 했었다.
하지만 실제 공무원으로 일해보니, 아빠가 그토록 장점이라 말씀하셨던 '직업적 안정성'을 뛰어넘는 힘든 점들이 많았다. 나중에 이 주제로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 예정이지만, 요점만 얘기하자면 성향과 적성이 잘 안맞았달까. 지금은 공무원을 그만두고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고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에 너무 좁은 시각으로 진로를 정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와 가정에 기여할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것은 부단한 시행착오와 탐색이 필요한 일이고, 다양한 분야와 사람들을 경험하며 스스로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엔 심지어 유치원 의대반도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진로 탐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어른들의 관점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길이 마치 아이 인생의 정답치처럼 제시된다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성'과 '나다움'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모든 것에는 '공'과 '과'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공무원 시험준비부터 일하는 기간까지 모두 그 과정이 즐겁고 의미있었기에, 지금의 '나다움'을 구성하는 하나의 소중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보면 남편이 또 한마디 할지 모르겠다. "어머, 벌써 기억이 미화되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