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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도 악인도 없다. 치열한 외로움만이 사투할 뿐.

엄마는 왜 대치동에 인생을 걸었을까 #2편

by 고시포비아 Mar 12. 2025

자.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아마 '엄마는 대치동의 극성맘'이고, '아빠는 자상한 길잡이'었나보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착한 아빠'와 '나쁜 엄마'라는 단순한 표면적 이미지는, 이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로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는, 그리고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엄마의 대학에 대한 집착'이 우리집을 가린 그늘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켜켜이 쌓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빠는 충실한 가장이셨지만, 엄마와 지독히도 성향이 맞지 않았다. 먹는 것을 참 좋아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끼니를 노가리 명태로만 때워도 전혀 상관없을만큼 먹을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 엄마가 차린 따끈따끈한 밥상을 앞에 두고 갑자기 청소를 하러 간다던지, 세탁기를 고친다든지, 별안간 다른 볼일을 보러 가시곤 했다. 만약 내가 밥을 차렸는데 남편이 매번 딴일을 하러 간다면? 상상만 해도 열불이 터질 노릇이다. 하루에 삼시세끼를 차리던 엄마는 오죽하셨을까. 순식간에 점화된 부부싸움이 화르륵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는 동안, 정성스레 차려진 밥은 차갑게 식어갔다.


아빠는 친할머니와 오래 전부터 의절을 했다. 경상도 집안의 장며느리였던 엄마는 친아들도 왕래하지 않는 시댁의 명절과 제사를 챙겨야 했다. 넉넉치 않은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용돈을 챙겨드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친정 엄마라는 든든한 백이 없어서였을까, 시댁에 정성을 다해봤자 광(光)을 팔기는 커녕 다른 며느리들과 비교당하며 멸시 받기 일수였다. 아빠는 부모한테서 어렸을 때 받은 분노는 아내에게 풀면서, 정작 친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는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만약 내 남편이 시댁 문제를 나에게 떠넘기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뒷골이 당긴다.




사교육비로 인한 생활고 때문인지, 아빠는 유독 외식에 인색하셨다. 중학생 시절, 내 생일을 기념해 과천에 오리고기를 먹으러 간 적이 있다. 무한리필이 된다는 팸플릿을 보고 찾아갔지만, 도착하고 나서야 주말에는 정식 메뉴만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통 형편의 가정이라면 이왕 멀리까지 온김에 정식 메뉴를 시켰겠지만, 아빠는 다른 곳에 가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오리집 주인장은 이번만 특별히 무한리필로 드리겠다며, 팔고 남은 비계 부위를 가득 가져다 주었다. 그것도 나름 오리라고 다같이 비계 부위를 배터지게 먹었고, 그날 나는 단단히 체해 집에 가는 길가에서 입으로 코로 토를 게워냈었다. 생일날 딸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어했던 엄마가 속상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내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을 때면, 아빠는 본인 유년시절에 학대받았던 트라우마로 인해 유독 과하게 반응하시곤 했다. 아빠가 방패가 되어줄 때도 많았지만, 때론 무난하게 끝날 수 있었던 모녀간의 불화를 더욱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아빠의 기이한 면모와 행동은 이외에도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만큼 셀 수 없이 많았다. 엄마는 수도 없이 이혼을 생각하면서도 자식 때문에, 또 전업주부로서 경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같이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 역시도 가장으로서 팍팍한 현실을 이겨내야 하는 외로움을 이고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는 다정하고 자상한 아빠이자, 아내에게는 괴팍하고 인색한 남편이 되어버리는 그 모순적인 태도는 가정의 혼란을 야기했다. 엄마는 늘상 "그래도 너한테는 좋은 아빠잖니"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분자와 분모의 공약수가 1뿐인 기약분수처럼, '자식을 향한 사랑'만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결국 엄마는 자녀의 입시라는 맹목적인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며 젊은 날을 버텨내셨다. 하지만 딸마저 독립하여 자신의 품을 떠난 이후에는 그 힘든 삶을 버텨낼 원동력을 잃어버리시고 말았다. 내가 대학에 간 이후 엄마는 늘 "너가 잘되었지만 나는 덕 본 것이 하나도 없다."며 신세를 한탄하셨다. 그토록 간절했던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녀의 과실이며, 본인에게는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온 말씀이셨을 것이다. 어렸던 나는 지나가는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고, 더욱 엄마를 멀리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엄마는 이후 삼촌이 운영하시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갈 곳 없는 에너지를 풀어내었고, 그 안에서도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의 보람을 찾으셨다. 하지만 가족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회사일로 대신하기에는 그녀 안의 외로움이 너무나 커서였을까. 엄마는 삶에 미련이 없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귀신같이 암이 찾아왔고, 이를 방치한 엄마는 2년 간의 투병 끝에 결국 외할머니의 곁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보다도 엄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것은 다름아닌 아빠라는 사실이 실로 가슴 아프다. 삶의 희로애락은 기승전결 없이 한 순간 몰아 닥쳐왔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것도 말도 사실이었다. 아빠는 '이제야 살만해졌는데, 뒤돌아보니 아내가 없다'란 말을 되뇌이고 있다.




떠나신 분은 말이 없다. 그 인생의 발자취에서 숨겨진 메세지를 찾아 살아있는 자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가 망자와 나눌 수 있는 몇 안되는 대화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삶을 통해 배우자와의 관계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생활력을 잃고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큰 리스크가 된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리고 비틀린 부부관계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자녀를 통해 채우려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는 알 수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그저 아이로서 순수하게 남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입시왕국은 자녀의 이 소중한 영역에 부모가 개입할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한다. 배고픈 물고기가 달콤한 미끼에 먼저 걸려들 듯, 외로운 엄마에게 '자녀의 입시 준비'는 너무나 매력적인 도박이다. 물론 자녀의 교육은 부모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아이들이 이용당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이야기가 더는 이어지지 않기를.

아이들이,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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