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해보라고 말하자.
우리나라가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빨리빨리‘로 대표되는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는 조직의 역량을 한곳에 집중시키기에 수월하고,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Fast Mover보다는 Fast Follower 전략을 선호했던 국내 회사들에 최적의 조직 문화였다. 이런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는 속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조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리더의 지시가 옳은 방향인지 합리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리더가 정해준 방향에 Align 하여 절대복종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VUCA(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과 모호성(Ambiguity)) 시대가 도래하면서 속도를 추구했던 조직 문화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필요한데, 우리가 추구했던 일사불란함은 다양성과 정반대인 획일성, 통일성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리더가 ’이 산이 아닌가벼‘를 외친 순간 이미 그 산에 다 와버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늦었지만 이런 변화의 움직임에 대비하기 위해서 Agile 조직 문화를 추구하고, 팀의 규모를 축소해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게 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해서 경력직 구성원을 영입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러 제도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제 일하는 문화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많은 뇌과학자가 주장하는 ‘인지적 게으름’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지적 게으름이란 인간의 뇌가 유익한 것보다 편한 것을 선호하며, 변화를 시도하다가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조직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인식을 해도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 편하므로 그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매켄지의 조사에 의하면 변화에 실패하는 원인 중 1위가 변화에 대한 구성원들의 저항(39%)으로 나타났다.
지금 일하는 조직에서도 유사 사례가 있다. 2년 이후에 필요할 수도 있는 기술 혁신 아이디어를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회의가 있다. 각 팀에서는 나름 고민하여 아이디어를 상위 관리자에게 심사를 받기 위해서 제출한다. 하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피드백은 ‘그게 되겠냐?’이다. 자신이 모른다고 생소하다는 이유로 고심한 아이디어를 한방에 짓뭉개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점점 시간이 갈수록 아이디어 제출 건수가 줄어들고, 예전에 채택된 아이디어를 약간 변형하여 제출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기술 혁신은 없고, 해오던 일과 유사한 아이디어 제안만 반복하는 상황이 되므로 차별화된 성과를 낼 수 없게 된다.
대부분 회사에서 다양성 관련 교육을 추진하는 과정은 ‘1) 회사 차원에서 다양성을 고려한 새로운 경영 이념을 담은 가치와 신념을 만들어서 회사 인트라넷에 공유함, 2) 이에 맞는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 혹은 동영상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와 신념을 강제 주입함, 3) 연말에 각자가 다양성을 얼마나 추구하고 있냐고 설문조사를 함’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주입식 교육 후 시험 보는 패턴이다. 마치 1) 2차 방정식이 뭔지 설명해주고, 2) 2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열심히 외우라고 시킨 후에, 3) 시험을 봐서 얼마나 2차 방정식을 이해했는지를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2차 방정식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부분 근의 공식을 까먹으면 2차 방정식을 풀지 못한다)
와튼 스쿨의 경영학과 교수인 그레고리 세어는 그의 저서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변화관리의 기술’에서 리더들은 신념과 가치를 강조하면 자연스레 문화가 조성되어 행동의 패턴이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행동이 신념과 가치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Top down으로 교육하고 변화를 독려해도 실제 리더가 변화에 동참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구성원에게 변화를 위한 설득을 통해 행동하게 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관련된 실험 관련하여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한 실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출처: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
A반: 나무 블록 모음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5개씩 골라서 만들고 싶은 것 만들라고 함
B반: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것을 먼저 말하게 한 후에 나무 블록 모음을 보여주고 만들라고 함 (아이들이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임을 모른 채 새로운 것을 먼저 말하게 함)
실험 결과는 이랬다고 한다.
A반: 남자는 대부분 자동차를 만들고, 여자는 대부분 집을 만듦 (다양성 수준 낮음)
B반: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많이 나옴 (다양성 수준 높음)
동일한 수준의 아이들에게서 왜 이런 큰 차이가 생겨날까? A반은 내가 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인 데 반해, B반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교육이 아닌 상황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직장에서는 리더가 어떤 생각과 자세로 구성원을 이끌어 나가느냐에 따라서 조직의 다양성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구성원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나 정보를 제시하더라도 리더가 그 가치를 모르고, 무시하면 절대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리더가 좋은 아이디어가 이런 것이라고 사례를 들어 조직에 이야기하면 구성원은 그 아이디어와 유사한 것들만 이야기하게 된다. 리더가 스케치북에 밑그림을 그릴수록 구성원은 색칠만 해야 한다. 조직 내에서 진정한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다면, 스케치북에 아무것도 그리지 말고 그들에게 마음대로 그려보라고 내밀자.
구성원과의 1:1 미팅에서 ‘과감하게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을 때, 그들이 가장 많이 줬던 의견은 ‘과감하게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고과에 악영향을 받을 것 같은데요?’ 였다. 매우 현실적인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인사 평가는 각자의 핵심 성과 지표(KPI: Key Performance Indicator)를 얼마나 어떻게 달성했는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성원에게 제안했던 절충안은 '1) 본인의 Resource의 20%를 각자 새로운 과제를 위해서 써볼 것 (호응이 좋으면 확대 추진), 2) 실패하더라도 충분히 배울 점이 있었다면 성공과 유사한 수준의 성과로 인정, 3) 과제의 KPI는 없고, 점검도 하지 않음' 이었다.
위의 절충안은 그저 새로운 시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다양성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이디어로 추진된 다양한 일들이 설령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질책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이뤄내고자 했던 노력 그 자체를 칭찬해줘야 한다. 새로운 시도가 실패했을 때, 용인해주지 않고 인사 평가에 반영한다면 아무도 새로운 일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실수를 안 하는 방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밖에는 없다. 리더가 감내할 수 있을 한도 내에서는 구성원이 마음껏 해볼 수 있도록 위임하는 것이 그들의 다양성과 직무 역량을 동시에 키워낼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