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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김춘식 May 27. 2020

간 큰 남자입니다

점심 도시락

도시락이란 단어만 들어도 중년이 지난 분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하기 딱입니다. 신작로 몇 키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씩씩하게 걸어 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본 말로 "뻰또" 였죠. 긴 등하교길을 걷다보면 김치 국물이 알루미늄 도시락 밖으로 흘러나와 벌겋게 물들어 버린 교과서, 공책을 한 학기 동안 군소리 없이 들고 다녀야 했고, 행여나 숟가락, 젓 가락이 없다면 즉석 나뭇가지로 자연산 친환경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분홍색 소시지는 말도 못 할 호화 반찬이었지만 반대로 검은콩 반찬은 염소똥으로 놀림감이 되기 했었죠.


점심을 위해 도시락을 들고 다닌 지가 6년 정도 되어 갑니다. 직장이 다른 건물에 세를 살 때는 공동 식당 이용이 가능해 점심을 별 고민 없이 해결했지만 독립된 청사로 이전을 하고부터는 점심은 출장 등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시락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소네 식당 운영을 검토했지만 남극, 북극 철이 되면(남극은 11월~3월, 북극 7월~10월) 출장자가 워낙 많아 식당에 수지 타산을 맞추어 줄 수 없다는 모양새로 여론 수렴 결과를 반영하여 식당 대신 식비가 급여에 반영되었습니다.


도시락이라는 게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거죠. 장점은 때가 되면 하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가 고민되지 않아 매일 이 식당, 저 식당을 뛰어다니는 메뚜기 신세를 면하게 해 줍니다. 날씨가 더울 때, 추울 때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니 시간 절약, 귀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는 분은 죽을 지경이라는 거죠. 코로나로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의 식사 챙기는 것도 어마하게 힘들다고 어머님들 아우성인데 하물며 6년간 매일 도시락을 준비한다는 것은 여간의 정성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 인정합니다.


회식을 비롯한 외식을 하거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맛이 짜거나 싱겁거나 맵거나 하면 찌질하게 찾아가서 사실을 말하는 성격입니다. 이러면 식당 주인도 집 사람도 공공의 적인 양 무지, 무지, 무지 싫어합니다. 주는 대로 (처) 먹으로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다음부터 개선이 될 거라는 신념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칩니다만 도시락만은 반찬 투정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거슨 신성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아침마다 주는 대로 조용히 감사한 마음으로 가방에 넣고 들고 나와야 합니다.


난감할 경우도 가끔씩 발생하곤 합니다. 영란법 시행 이후로 가급적이면 점심시간이 임박하게 외부인과의 회의 등 업무 협의 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지만 뜻밖에 발생하는 돌발 점심 약속에 도시락을 까먹지 못하면 퇴근해 집에 다시 들고 가기 무섭습니다. 그래서 일찍 집에 몰래 들어가 잽사게 까먹거나 6시 이후 사무실에서 점심 도시락을 불법용도 변경해 저녁 도시락으로 먹고 가기도 하였습니다. 도시락을 안 까먹고 집에 들어가는 날에 들키기라도 하면 코피 날 정도로 혼나기 때문입니다.


도시락을 오래 먹으면서 간혹 황당한 경우는 먹으면서 반찬과 밥의 배분을 실패하여 밥이 남을 때, 도시락이라도 국이 없어 밥이 안 넘어갈 때입니다. 비상식량으로 김이랑 밑반찬을 가져다 두라 주변에서 권유하지만 그것도 귀찮아 꾸준히 하기 어렵네요. 또한 도시락에 국까지 추가한다면 몹쓸 짓 일 것 같아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습니다.


배분에 실패한 좋지않은 예



한 사람은 간이 간 큰 남자이고 한 사람은 6년간 간을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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