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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김춘식 Jun 04. 2020

정신 줄 놓았거나 운이 없었거나

1박 2일 출장, 애당초 내키지 않는 일정이었다. 첫날은 내년 예산 확보를 위한 치열한 소모전을 해야 할 S시를 거쳐야 했다. 내키지 않았던 이유는 출발점부터 자료 제출이 시원찮은 터라 영혼이 탈탈 틀릴 걸 각오했음에도 긴장에 요동치는 위장 운동이 버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하기 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평소 비 내리는 것과 빗소리를 좋아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다. 짜증이다. 목적지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퍼붓고 바람이 세차다. 목적지 방향은 모르지만 1킬로 정도의 거리, 차 타기도 애매하고 걷기도 그렇다. 어라 가방에 우산이 없다. 버린 곳이 광명역 내 식당인지 기차 안인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비는 뿌리고 바람은 세차고, 우산은 없고. 그리 비를 맞고 서럽게 걸었다. 약속은 신뢰이기에.

비를 싫어 하는 날은 거의 없는데


여수행 기차를 탔다. 코로나 19 이후 기차를 타면 옆자리에 사람이 없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옆자리가 빈 것은 고사하고 손님이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데 마스크는 반쯤 하고, 큰소리로 킁킁 거리며 연신 바람을 불어 낸다. 그따나 좁은 의자인데 엉덩이를 최대한 통로 쪽으로 밀착하고 목도 비스듬히 통로 쪽으로 돌렸다.


저녁은 컵라면.


다음날 오전,  일을 마무리하고 상경할 기차 시간표에는 광명역 도착 시간이 퇴근시간과 유사한 기차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전화 넘어 A실장 목소가 숨이 넘어간다. 미비 예산 제출 자료를 보완하란다. 연장자라 욕은 못하고 ㅆ 말이 나오는 게 급하긴 한가보다 한다. 치명적인 초기 자료의 부실은 돌려 막기에 급급하다. 땀을 삘삘 흘리며 나름 세운 논리대로 문서를 수정하고 전송을 했다. 기차 시간 확인,  세 시간 후에  있단다. 헐이다.


여수발 광명항 16:35 기차 안, 이제는 집에 가는구나 싶었다. 또 다급한 A실장, S시로 냉큼 오란다. 기차 안인데 어쩌라고? 공주에 내려 택시 타라 고한다. 택시비 출장 지원도 안되는데. 결국 천안아산역에서 내려 다시 역방향으로 오송행 기차를 탔고 오송역에서 택시를 탓더니 택시비 23,000원, 출장비 초과다.


재차 남은 영혼마저 털리고 A실장과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다 도착한 오송역, 운도 없는지 3분 차이로 기차는 하염없이 떠나고 45분 후 23:00시에 기회가 주어졌다. 먹을 시간이 없었던 저녁, 결코 먹고 싶지 않았던 저녁, 이제 심하게 배가 고파왔다.

일을 마친 늦은 밤, 배가 고프다.


기차를 탔다. 분위기가 휑하다. 역무원이 표를 보잔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이 가늠된다. 두어 번 표를 보더니 기차를 잘 못탔단다. 절망, 분노. 22:57분 차를 탔다는 것이다. 광명역 정차하지 않고 바로 서울역, 3분 간격으로 배차한 철도공사 문제인가? 정신줄 놓은 내가 문제인가? 광명역을 지날 때 간절한 충동을 느꼈다. 뛰어내릴까? 비상정지 단추를 누를까? 그냥 괴성을 질렀다.


덕택에 서울역에 왔다. 자정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다. 멍청함에 정신줄 놓음에 화가 치밀었다. 호객행위를 하는 40,000원짜리 택시를 5,000원을 깎아 탔더니 이게 뭐람, 불법 승용 총알택시, 에라 모르겠다. 타자. 와중에 택시기사님의 깨알 같은 위로, "서울역에서 광명역까지 가는 당신 같은 손님이 많아".  동병상련이다. 위로된다.

난 서울역 니가 싫단다


광명역에 주차된 차를 타고 집 도착, 밤 한시가 넘었다. 졸리다. 운이없는게 아니고 정신줄 놓은 것이 맞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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