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유명한 수필인 "무소유" 내용 중 난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출타 시 난에 대한 집념이 집착임을 알고는 유정有情 했던 난을 친구에게 주고 난 다음 비로소 홀가분해졌으며 이를 시작으로 하루에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는 무소유無所有를 다짐을 했다 합니다.
법정 스님의 난 같은 꽃화분이 우리 사무실에 있습니다. 행여 조금 긴 출장이라도 갈 때면 말려 죽을까 직원들에게 물을 줄 것을 일러 주고, "일을 실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화분 꽃이 죽으면 고가 1점 깐다"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떠납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두 가지의 짐이 마음에 생깁니다. 업무 외 일로 괜히 갑질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과 간곡한 부탁에도 물 주는 것을 잊어 꽃이 죽을 까 노심초사하는 걱정입니다.
오늘 한참을 미루어 온 화분 분갈이를 해주었습니다. 아스팔트, 콘크리트에 찌든 현대인들이 그나마 힐링할 수 있게 해주는 화분이긴 하지만 볼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화분이란 게 사람이 임으로 제한한 용기 내에서 식물의 뿌리 성장을 강제 통제 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반려견에 비유하자면 1m 줄에 묶여 평생을 사는 것이라 하겠지요. 조금 너무 위인적인 사고라 해도 뭐 그러합니다.
몇 개인 사무실 화분은 나름 사연이 있습니다. "꽃기린"은 집에서 버려야 할 처지가 된 가지 하나를 작은 화분에 심어 사무실로 가져온 것으로 그것도 생명이라고 살아야겠단 마음이 있었던지 생각 외로 무럭무럭 자라 준 것이고, "고무나무"는 잘라 버리는 가지를 다른 화분에 꽂아 둔 게 신기하게 뿌리가 자라고 다른 식물과 공생하던 것입니다. "제라늄"은 다른 부서에서 화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가져와 살린 게 5, 6년 전이고 "마른 장미 한 송이'는 코로나 시대에 우리 총무실 직원이 위로차 1층에서 나누어 준 것을 말려 둔 것, "헬리오트프로"는 이번 포장을 받았을 때 우리 실 직원으로부터 축하로 받은 것입니다.
사연 인즉 모두가 한 가지씩 살아가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흙(거름) 갈이 한 꽃들은 다시 자라를 잡아 당분간 넓은 공간에 뿌리를 내려가겠지요. 법정 스님처럼 긴 시간을 함께한 유정을 떠나보내고는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뿌리가 또 자라면 더 큰 화분을 갈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