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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김춘식 Apr 24. 2020

배 이야기 7

현대상선(現代商船) vs HMM

긴 12년의 인연이 시작된 기억은 또렷하다. 그 해 2월 23일 졸업 다음날 입사 면접 날이었다. 해운경기가 폭발적으로 호황인 시절이라 우수한 3등 항해사, 기관사를  선점하기 위하여 각 해운사의 선원 선발팀에서 졸업생들에게 공을 들이던 호랭이 담배 피던때 였다. 해군 장교로 지원한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성적이 좋으면 호남 탱커, 유공해운, 현대상선, 한진해운, 범양상선 등에 우선 지원을 했다.


인연이 시작되려고 했던지 현대상선에 지원을 하게 되어 보나 마나 한 형식적인 서류 심사를 통과하고, 2차 면접을 본 장소는 부산 중앙동에 있는 사무실로 지금은 현대 자동차 중앙동 지점이다. 면접은 2층에서 시행되었고 일대일이 아닌 몇 명이 들어가는 형태였다. 그런데 유달리 면접 복장이 나 혼자 정장이 아닌 잠바여서 튀었다. 반항처럼 고상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양복 살 돈이 없어 평소 옷차림을 하고 간 것뿐이다. 지금 같으면 괘씸죄나 성의 부족으로 탈락이겠지만 운 좋게도 해운경기 덕에 3등 기관사가 금기사라 합격했다.


한자 사명이 좋았다

배승팀 담당자가 37기로 기억하는 임x규 선배 이셨는데 해기사로가 아니고 현대그룹 공채로 채용되었음에도 발령사가 현대상선이라 탐탁지 않다는 푸념을 한 기억이 난다. 합격하고 바로 부산 어디 외각 수녀원에서 입사동기들과 집합 교육을 받았고, 그 후 3월 20일 드디어 부산 5 부두에서 2,700 컨테이너를 적재하는 배에 3등 기관사로 올랐다. 반짝이는 부산 영도의 불빛을 마주 보며 첫 승선에 대한 두려움에 약간의 떨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탄 배의 이름은 리치먼드 시리즈 불린 배 중 한 척으로 Lalandia호였다. 라란디아호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세월이 흘러 선명이 라란디아호에서 현대 프론티어(Hyundai Frontier)호 변경되고, 내가 1등 기관사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 탄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선원 생활의 시작과 끝을 동일한 배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5년 동안의 배 타는 생활을 마무리하고, 울산 현대중공업 내에 있는 현대상선 신조기술부에 발령받아 95년 1월 19일 첫 출근으로 바다에서 시작된 인연을 육지에서도 계속 이어갔다. 첫 출근일을 기억하는 것은 하루 일찍 출발해 울산 숙박시설에서 1 박하면 될 것을 당일 새벽, 대구 동부 정류장에서 울산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탔었고 그게 입석이어서 순진한 뱃놈이 육상직 첫 출근에 두근두근 긴장된 두시간 내내 마음도 몸도 힘들었던 긴 날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해운경기가 좋아 회사 표어가 공격적으로 FA2000이었다. 21세기에는 200척의 배를 보유해 거대 해운회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연도별 선박 건조 계획이 표시된 문서에 뻭뻭한 건조 예정 척수를 보았을 때 당분간 밥줄 끊길 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FA가 Full Ahead(전속 항진)란 의미일 텐데 IMF가 터지면서 FA의 의미가 Full Astern(전속 후진)으로 의미가 퇴색된 듯 1998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선박 건조 척수가 줄어들더니 2000년에 들어서자 근무하시던 분들이 한 두 분 배타러 나가기 시작했고 나도 서서히 현대상선이란 회사와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 감지했다.


울산역에서 무궁화호 타고가 받은 상장


울산에서의 좋은 기억들은 국내 최초의 LNG 선 "현대유토피아"호외 LNG선의 건조, 현대상선 태동 시의 유조선 선명을 이어받은 현대중공업 Hull No. H907, 908로 현대 스타호, 현대 베너호의 건조를 지켜 본 것이고, 뭐니 해도 솔솔 한 추억은 배의 좌현, 우현에 현대  영어명 HYUNDAI 알파벳 중 빨래집게 "A"자의 왼쪽 가로선이 세로에 붙일 것인지 뗄 것인지에 대해 서울 본사 기획실과 다투었던 일이다. 로고 정책이 변경되었는데 적용시점 때문인 것 같았다.


다투었던 문제의 A

현대그룹에서 그렇게도 공들였던 2002년 월드컵을 불과 5개월여를 앞두고 더 이상 회사에서 용도가 없어진 나와 부서였기에 미련이란 구명복을 입고 퇴선을 결정했고  우리사주 한 주 구입가 평균 약 만 2천 원이었던 것을 7백원대가 된 종이 쪼가리 퇴직금을 들고 길었던 12년의 간의 현대상선과의 인연을 종료했다. 한 걸음 뒤에서 보아야 할 친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크다, 길이 400미터


최근 난파의 위기에 빠진 현대호에 구할 새로운 선장이 탔고, 사명도 현대상선에서 HMM으로 변경하였으며, 24,000 TEU 초대형 컨테이너 1차선 인도에 이어 총 12척이 순차적으로 인도된다는 긍정적인 소식이 들린다. 아직 HMM보다 현대상선(Hyundai)이란 회사명이 입에 더 착착 감기고 좋은데 옛 향수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짧은 내 생각으로 아쉬운 건 영어로 HMM, 한국어로 그냥 현대상선이라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사명 하나 영어로 바꾼다고 회사가 잘 될 수는 있겠냐 마는 해양강국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기대가 있는 만큼  효자 LNG 운반선,  자동차 운반선 등을 매각해야 하는 유사 상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사명 변경이 답이 아니라고 한 것이 단지 나만의 향수였다는 것이 증명 되도록.   


Bon Voyage, H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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