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가발을 어루만지고 있다면...
스텔라,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아빠는 암에 걸리고 나서 머리 빠진 자신의 모습이 참 싫었나봐.
내가 대머리가 되본 적이 없어서 사실 그 마음을 이해 못 했어. 아빠도 머리카락이 다 빠져 미끈한 머리가 부끄럽다고 한 번도 말 한 적 없거든. 아빠는 항상 머리에 두건을 쓰고 다녔어. 어디에서도 그 두건은 벗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아빠 방에 있을 때만 벗었어. 혹여라도 내 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아빠는 서둘러 그 두건을 머리에 싸맸지. 몸이 아프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아빠의 마지막 자존심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데 언니 결혼식이 있던 날, 언니가 가발을 일주일 동안 대여를 했었거든. 그래도 신부입장할 때는 아빠도 번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데 식이 다 끝나고 며칠 뒤 가발을 반납 해야 할 때 쯤 아빠가 가발을 다시 쓰더라고. 그리고 나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어. 평소에 사진 찍어달라는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티를 입고 찍어도 보고, 외투를 입고 찍어보기도 하고 덜 아파 보이게 찍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빠는 연약해 보는 모습이 사진에 드러나는 걸 보더니 실망을 했어.
그렇게 30분을 찍고나서 생각해 보니 그 가발이 갖고 싶었나 봐. 그런데도 난 왜 그 가발을 사줄 생각을 못 했을까. 아빠가 암에 걸리고 나서 하나도 원하는 것 없었는데... 갖고 싶어도 딸한테 사달라는 말은 차마 못 했나봐.
그래도 내가 아빠가 암 걸리고 난 후에 후회하는 것들, 바라는 것들을 인터뷰식으로 촬영한 적이 있거든. 유튜브 채널에 올린다고 하니까 그 땐 아빠가 두건을 벗고 촬영에 임하더라고. 아빠 본연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기로 했나 봐. 그 영상을 찍을 때만 하더라도 아빠가 두 달 뒤에 그렇게 세상을 떠날 줄 몰랐어.
아빠가 이 세상에 없고 나니까 그런 영상들 하나하나가 참 소중해졌어. 아빠가 움직이는 모습, 말하는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잖아. 사진만으로는 아쉬울 때가 많거든. 아빠가 세상을 떠난지 4개월 쯤니까 아빠의 목소리를 내가 어느덧 잊고 있더라고. 그럴 때 영상을 보면 '아빠 목소리가 이랬구나'하고 놀라. 그래도 영상에서나마 아빠는 살아있으니까 다행이야. 다만, 더 많이 찍어놓지 못 해 아쉬울 뿐이야.
스텔라, 혹시 아빠가 그곳에서도 가발이 필요하다면 꼭 하나 사 줘.
이제 쓸 날도 얼마 없다며 거절해도 그냥 말 없이 사다 줘.
그럼 아빠는 또 별 말 없이 웃으며 그 가발을 쓸 테니까.
그리고 영상을 많이 찍어 놓길 바래.
기억은 흐려져도, 좋은 추억은 계속 볼 수 있게.
https://www.youtube.com/watch?v=-EQ5j1KIM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