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민지 Sep 23. 2022

대형 심리상담 TV 프로그램에서 섭외 전화가 왔다

SBS 예능 프로그램 <OOO> 작가입니다.
OOO 박사님의 상담으로 솔루션을 제시하는 토크쇼를 기획 중입니다.
섭외 관련하여 말씀 나눌 수 있을까 하여 출연의사 여쭤보고자 DM 드렸습니다.


스텔라,

신기한 일이 생겼어. 요즘 여기서 가장 핫한 박사님이 진행하는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 있는데 출연 의사를 묻지 뭐야. 알고보니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내 유튜브 영상을 보고 연락이 온 거였어. 부모님과 자식의 관계에 대한 기획인 것 같아 마음이 막 들떴지.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그런가. 내가 무언가 시청자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발을 동동 굴렀어.


직접 미팅 전에 전화 통화를 잠깐 할 수 있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흔쾌히 전화를 받았는데 젊은 여자분이었어.

가능한 한 빨리 미팅을 하고 싶다고 하길래 나는 서둘러 기차를 예매해서 서울까지 올라갔어.


오랜만의 서울행이라 좋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역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SBS 방송국 건물이 보였지. 여기가 연예인들이 방송을 찍는 곳인가!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종종 걸음하며 정문으로 갔어. 커피를 들고 명찰을 맨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길래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막아섰어.


"어떻게 오셨죠?"

"저 여기서 오늘 미팅이 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사투리를 최대한 자제하며 입을 오물 거렸지. 경비원은 내 이름을 듣고 무슨 종이를 확인하더니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어. 방송국 문을 들고 들어가니 천장은 굉장히 높았고, 벽에는 진행중인 드마라, 예능 프로그램들 간판이 걸려있었어. (혹시나 서울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전 날 미용실 가서 파마한 건 비밀.)


연예인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그런 행운은 없었고, 작가님을 따라 저 위 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어. 문이 열리고 긴 복도를 지나니 투명유리로 된 방이 하나 보였는데 여자들만 소복하게 앉아있는 거야. 작가들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어. 왜 방송작가들은 거의 여자일까? 피디들은 남자인데 말이야. 하여튼, 손에 땀이 났지. 그 방을 들어가니 긴 탁자가 있었는데 다들 둘러 앉아 있고, 중간에 빈 의자가 하나 보였어.


"저기 빈 의자에 앉으시면 돼요."

막내 작가인 듯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어.


내가 앉으니 한 분이 책상 위의 휴대폰 카메라를 설치하더라고. 카메라 테스트라며 카메라를 나를 향해 비췄지. 편안하게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시작하라는 말에 한쪽 씩 벗는데... 20개의 눈이 나만 쳐다보고 있더라고. 마스크 벗는 모습만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이지... 굉장히 민망했어!


그리고 그 때부터 폭풍 질문이 시작됐어. 한 시간쯤 나는 계속 말을 했어.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구체적인 경험 있으세요?"

"같이 저녁에 방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제가 잠깐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들어와서 엄마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면서 불같이 화를 냈어요. 왜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이랑 통화하냐면서."


나는 입이 바짝 말라갔어.


"엄마랑 어느정도로 친하세요?"

"저는 친구보다 더 친할 정도예요. 거의 모든 걸 이야기하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할 때 마다 경악을 했지. 어떻게 엄마랑 그렇게 지낼 수 있냐고. 나는 그렇게 지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는데. 사실 그 반응을 기대한 거긴 했어. 이 방송에 꼭 나가고 싶었나 봐.

그런데 나는 이 한 마디를 듣고 방송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져버렸어.


"캥거루족이고 명찰 달고 보내면 되겠는데."


사람을 앞에 두고 캥거루족이라니. 여기는 이런 말이 있지.

방송국 놈들!!


점점 기분이 안 좋았어. 실제로 나는 엄마랑 잘 지내고 있는데 우리 사이를 이상하고 뒤틀린 관계처럼 몰아가는 느낌이었거든. 그리고 계속 더 안 좋았던 일을 들추고 찾아내려는 느낌이었어. 


나도 알아. 갈등이 클수록 사람들의 흥미를 더 끄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남들에게 엄마와 나의 관계가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와 나는 한 침대를 썼고, 엄마는 사소한 것들에 예민해졌어. 이상한 일에 한 번씩 화를 냈지. 엄마가 나를 과보호하려 하고 이상하게 구는 거 알아.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어. 우리 둘 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아빠를 잃었고 엄마는 남편을 잃었잖아.


처음엔 출연을 바라고 여기까지 왔지만 점점 이야기 하다보니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엄마도 나도 노력하고 있거든. 우리 상황을 잘 헤쳐나가 보려고.


마지막으로 메인 작가로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물었어.

"그럼 오은영 박사님께 묻고 싶은 내용 있으세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어.

"아니요.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아직은 엄마가 화내게 놔둘래. 아빠 돌아가신 지 2주 밖에 안 지났잖아.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순 없다고 생각해. 인생의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면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을 살 이유가 있을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고쳐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자체로 좋은 일 아닐까.


스텔라, 너는 그런 적 없니?

남들은 다 이상하게 생각할 지라도 너의 안에서는 용서되고 괜찮은 일.

작가의 이전글 우울한 사람도 인생의 열정을 되찾는 일기쓰기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