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
하마터면 오늘 나는 죽은 아빠에게 평생 섭섭할 뻔했어.
아침에 장례식장을 나와서 잠깐 씻으려고 집을 들렀어. 할머니가 방에 누워계시더라고. 옛날 사람들은 도통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장례식에 할머니까지 있는 건 모양새가 좀 그렇대. 아들이 죽었는데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인지 모르겠어.
나는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옆에 가서 앉았어. 혼자 밤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싶어서 말이야. 그런데 내 속을 뒤집는 말을 하더라고.
"내가 너희 아빠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데이."
할머니는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고 말을 이어갔어.
"1등은 본인 자신"
그 말에 살짝 갸우뚱했어. 아빠가 본인을 1순위로 꼽을 만큼 평소에 자신을 사랑했나? 일단 그렇다고 하니 넘어갔어. 그리고 2번째가 엄마. 그것까지도 괜찮았어. 아빠가 암에 걸리고 나서 가장 많이 고생한 건 엄마니까. 그래서 엄마를 이길 생각은 추오도 없었어. 그 누구보다 아빠를 열심히 간호했거든.
그리고 대망의 3위.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대상은 내가 아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연민과 애정을 짓밟았어.
그 대상은 내 남동생이었지.
왜 충격이냐고? 내 남동생은 아빠가 입원했을 때 간 적이 몇 번 없었거든. 나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병원에서 전화로 "먼저 하늘로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 라고 말한 적도 없거든. 그리고 그 다음이 나였어.
그러니까 정리하면,
1. 아빠 자신
2. 엄마
3. 아들
4. 나
인정하기 싫었어. 남동생이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빠에게 중요한 순위라고? 아무리 잘해줘도 결국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 순위에 들지 못 한 건가? 그 순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아니야. 내가 애정과 노력을 쏟은 대상이, 그것도 부모가 그걸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약 기운과 잠을 잘 못자 정신 없는 와중에도 아빠는 마지막 순간에 딱 세 사람의 이름만 기억했어. 엄마,나 그리고 이모. 병실에 제일 많이 찾아가고, 아빠에게 아플 때 도움을 줬던 사람들 목록이야.
다른 사람 이름은 기억 못 해도 전화하면 어눌해진 입으로 "민지 내 딸" 이라는 말은 했어. 내 목소리도 기억했거든. 그런데 아들, 남자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 따져서 묻고 싶었어. 그런데 물을 수가 없잖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으니까.
나는 점점 분노를 느꼈어.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장례식장에 돌아가서 아빠의 영정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어. 그리고 속으로 물었지. '아빠 왜? 나만 아빠랑 친해졌다고 느낀거야?' 장례식 기간 내내 아빠의 영정사진을 볼 때마다 섭섭함이 물밀 듯 느껴졌어.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며 또 내 마음을 가다듬었지.
장례가 끝나고 나는 그 섭섭함을 이길 수가 없어서 엄마에게 말했어. 그랬더니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더라고. 엄마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너희 아빠는 분명 이렇게 말했어. 1순위는 나(엄마), 2순위는 너.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할머니가 정정하더라. 자기자신이 1순위여야 된다고. 그리고 딸보다는 아들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할머니는 아빠의 생각을 자기 멋대로 바꿨고, 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전한 거야. 사람을 컨트롤 하고자하는 욕심은 그 끝이 없나봐. 아들이 죽는 순간까지 아들의 생각을 조종하려고 한다니 말이야. 할머니가 평생 자식들을 제멋대로 통제하려고 애쓴 건 아는데 그 영향이 나한테 까지 도달하게 된 거야. 난 그 일로 영원히 아빠를 오해하고 섭섭하게 생각하며 내가 준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했다며 회의적인 사람이 될 뻔 했어.
얼마 전에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봤어. 그 영화에서 최고의 빌런은 주인공도 아니고, 지주도 아니고, 지주의 아들도 아니야. 바로 주인공의 할머니야. 자신의 아들, 손자까지 자기 손아귀에 넣고 그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꽉 잡고 흔들잖아. 아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죽어도 자신은 꿋꿋하게 살아서 손자까지 그렇게 살게 말이야. 남을 통제하려는 생각. 그 생각이 가장 사람의 욕구 중에 가장 끔찍한 거야. 모든 싸움은 내 생각대로 상대가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기대에서 시작하는 거니까.
어쩌면 나도 내 생각대로 아빠가 나를 2순위로 꼽도록 통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남자친구에게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지 않으려고 계속 애쓰고 있어. 내 생각대로 그 사람이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건 그들의 생각이라고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어.
스텔라,
너는 누군가를 네 멋대로 통제하고 싶은 적 없었니?
그로 인해 오해를 받거나 네가 맘 상한 적은 없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