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시간 딱 10년
내 죽음관에 영향을 끼친 건 너무나도 많다. 엄마, 친할머니, 외할머니, 처음으로 키웠던 강아지, 삼촌, 죽고 싶을 때 나를 위로해 주었던 아티스트의 자살.....
엄마가 자다가 급성 뇌출혈로 돌아가신 때가 당신의 나이 42살 때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 나를 그렇게 예뻐하고 냇가에서 물수제비와 퐁당퐁당 동요를 알려줬다던 아빠의 바로 윗형인 신현 삼촌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건 내가 스물다섯 살 때 큰 아빠의 딸 (우리 아빠는 8형제 중 일곱째, 그러니까 신현 삼촌을 포함하면 다섯째 형), 내겐 6살 많은 친척 언니와 술을 마시다가 듣게 된 사실이었다. 큰아빠와 우리 아빠 사이에 형제가 한 명 더 있었다고, 우리는 3대가 춘천에서 같이 살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삼촌이 나를 참 예뻐했었다고. 타인에게 듣는 나의 어릴 적, 내겐 남아있지 않은 추억에 그가 있었다. 취기에 그 말을 듣고 늦게나마 추모의 눈물을 흘렸지.
그렇게 조금은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죽음.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투병, 그리고 뺑소니로 뇌출혈까지 겪어본 당사자로서 죽음은 나를 언제든 덮칠 수 있는 존재라 여기며 자랐고, 또래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 동안 죽음을 생각하며 자랐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입학할 때, 고등학교 입학할 때, 수능을 보던 당일, 대학교를 입학했을 때, 투병 때문에 휴학하고 그럼에도 이겨내고 복학했을 때, 첫 취업을 했을 때, 모든 순간이 신기했다. 여태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1년 뒤, 6개월 뒤에도 살아있을지.
거친 인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 수명도 42살까지로 정해졌다. 스스로에게 자발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장기적인 계획은 할 수조차 없었다. 10년 뒤 내 모습은? 한참 유행하던 100문 100답이나, 회사 지원서에 5년 뒤 직장에서의 내 모습은? 이런 항목도 적기 어려웠다.
내가 죽음 앞에서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나를 붙잡아줬던 건 대부분 덕질이었다.
대표적으로는 넬의 음악, 죽고 싶을 땐 꼭 '자해'만 한 곡 반복으로 들었다. 그렇게 고3 시절을 버텼다. 그냥 책상에 앉아만 있어도 눈물이 나고, 대부분의 아침을 울면서 맞이했다. 그저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보다 심하게. 그때 자해를 들으면 눈물이 그치고 마음이 진정됐다. 대부분의 시간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한 곡 반복을 했던 거겠지.
그리고 대학교 2학년이 들어서며 지병이 재발해 입원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을 때, 그리고 삭발한 머리 때문에 퇴원을 하고도 6개월을 칩거하며 히키코모리로 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 밖으론 한 발짝도 떼지 않은 게 수개월 째 이어졌다. 그러다 처음, 그 해 처음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가 딱 하루 있었다. 매해 10월 첫째 주 토요일, 여의도에서 '불꽃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앞선 발행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퇴원 이후 처음, 자발적으로 현관 문턱을 나간 때였다. 고2 때 우연히 봤던 여의도 불꽃축제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도 모르게 가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가발에 페도라까지 쓰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여의도는 집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집 앞 놀이터도 안 나간 주제에 몇 개월 만에 세상으로 나간 거였다. 그제야 겁이 났다. 사람들 한 복판에서 픽 쓰러져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불꽃은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좋은' 감정이었다. 귓고막을 때리는 펑펑 소리가 마치 내 속에 있던 응어리와 번뇌, 우울감을 다 터뜨려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축축한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처음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지금껏 시간에 흘러 살아졌다면 이젠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터지는 불꽃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나는 불꽃마저 덕후가 되어 '불꽃처럼 살다 가야지'란 다짐을 하게 된 것 같다. 그 '삶에 대한 힘'을 얻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남은 시간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거친 파도를 쪽배 하나 타고 가듯 나아갔다. 남들처럼 4학년 2학기 대기업 취준에서 광탈하며 좌절도 해보고, 첫 취업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덕질만 하던 아티스트들을 일로써 만나는 덕업 일치도 하고, 연봉도 올라보고, 신입사원 공채 때는 짤 없이 광탈했던 대기업을 경력직으로 입사하는 영광도 누려봤다.
30살 이란 지점을 지나자 모래시계 안의 모래알들이 배속 붙은 마냥 빠르게 떨어졌다. 이제 32살도 세 달 남았으니, 남은 시간은 10년이 채 안된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순 없었다. 아직 못 한 게 너무 많다. 인생 망해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생각이 들어 퇴사를 했다. 인생에 겁만 많아 잔뜩 움츠려 들어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우는데 100만 원 쓰기, 작사 배우는데 한 학기 등록금보다 비싼 돈을 지불하기, 탈색하기, 피어싱 하기, 타투 하기, 담배 피우기, 망설였던 모든 것을 다 하기 시작했다. 30살이 넘어 새로운 꿈을 좇게 된 이유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삶이 소중해서였다. 음악을 할 수 없으니 좋은 음악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지원 동기로 음악 회사에 입사했으나 회사 잔혹사와 팀의 이동, 여러 사람들 사이의 사건들 때문에 공황장애를 얻고 퇴사했다. 그 회사가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이직했는데도 결과는 같았고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은 늘어만 갔다. 틈만 나면 죽을 생각을 하는 날이 다시 되풀이됐다. 그러다 뺑소니 당하듯 다시 아이돌에게 입덕을 했다. 괜히 입덕할 때 '치인다'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실제로 차에 치여본 경험이 있는 나는 그 표현에 감탄했다. 입덕은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찔하게 쿵, 사고 나듯이 일어난다. 그렇게 나는 천재 작곡가라는 넬의 김종완과 세븐틴의 우지의 곡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음악을 못하지?
나는 글을 쓸 줄 알고 음악은 작곡을 하고 보컬을 해야만 음악이 아니다. 작사라는 분야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은 생을 글 쓰는데 집중하자. 그게 에세이든 소설이든 가사든.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닌데 노후준비 엿까. 하고 싶은 거 하며 남은 생 보내련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만도 바쁜 하루다. 그러니 사는 게 재밌어졌다. 반면에 남은 시간 안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과, 남겨야 할 성과에도 다급해졌다. 짧은 생에 내가 살아있었다는 걸 남겨둬야 한다는 강박증.
작사반 중급반을 수료하고 고급반으로 올라가면서 자기 다짐을 인스타에 올렸다. 굶어 죽더라도 글을 쓰다 죽을 거라고.
적어도 창작은 고통이고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있지만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굶어 죽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니 42살까지, 딱 10년만. 한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려고.
늘 글을 쓸 때마다 유작이라는 마음으로 쓴다. 뭔가라도 작품 하나 제대로 세상에 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 심장 속 모래시계는 10년이 채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