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안 Sep 27. 2021

먹이사슬의 최약체, 사회생활이 지겨워졌다.

토끼인 줄 알고 살던 내가 알고 보니 벌꿀 오소리였다.

나는 감정이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 편이다. 포커페이스는 전혀 불가하고 마피아 게임도 못한다. 거짓말을 못하는 건 장점일까 단점일까, 한참 생각한 적도 있다.

확실하게 깨달은 것, 사회생활에서 감정이 솔직한 건 약점이다. 언제든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나는 눈물이 많지만 웃음도 많고, 화도 많지만 공감도 잘한다.

감정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숨기지 못하는 편이어서 친구들 사이에선 유쾌하고 사이다 같은 역할을 했지만 회사에선 아닐 때가 많았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안에 있어서는 누구든 들이받았다. 그게 팀장이든, 실장이든, 이사든 말이다.

모두가 ‘.. 네’라고 침묵하는 사이 혼자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인생 피곤하게 사는 지독한 쌈닭이었다.

첫 직장에선 팀원들이 다 있는 팀 회의에서 팀장과 소리를 지르며 싸운 적도 있었다. (물론 팀장이 남자 친구였기에 가능했던 건 함정이지만 당시엔 비밀 연애 중이었다. 싸움의 이유는 정말로 공적인 일이었다.) 파이터 기질이 첫 직장에서 사라질 일은 없고, 다음 회사에서도 계속됐다. 이 정도면 인사고과에서 안 좋은 점수를 받을 법도 한데, 객관적으로 결국 늘 퍼포먼스를 잘 내는 사람이었기에, 상사에게 눈엣가시일 순 있어도 그런 태도 때문에 연봉 협상에서 불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회사를 길게 다니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지겨워서였다. 아무리 외쳐봤자 바뀌지 않는 부조리함과 각종 빌런들이 가장 컸다. 혼자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팀원들을 선동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구절구절 말이 많았던 나도 점점 의견을 잃고 ‘네’라고 말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냥 편하고 싶어서. 그리고 루틴한 업무들이 노잼이었다. 콘텐츠 기획은 늘 새로운 것 같지만 늘 새로운 것을 하는 것조차 반복이 되면 루틴한 업무가 된다. 내 회사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정을 태워야 하나 현타를 제대로 맞았다. 이건 아닌데, 싶은 날이 늘어만 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결국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에 모든 회사에서 내 동료들의 반응은 신기하게도 한결같았다. ‘천군만마를 잃었다.’ 1명이 퇴사한다고 1명의 TO가 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남은 멤버들의 업무과중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팀장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쌈닭이 없어지니 그들에겐 방패 하나가 없어진 셈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회사가 지겹다기보다는 그냥 사는  지겨웠다. 이런 날이 계속 되다간 회사가 아니라 사는 걸 관두게 될 것만 같았다. 3주에  번씩 만나는 주치의 상담 샘을 찾아뵌 , 평소 같은 ‘어떻게 지냈어요 혜지 ?’ 따스한 그의 물음에 ‘죽고 싶어요라며 냅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당황했다. 3 전까지만 해도 많이 괜찮아졌었잖아요? 다그치지 않고  소리를 꺼내 주었다. ‘그냥  지겨워요. 그만하고 싶어요.’ 우습게도  일은 퇴사  벌어진 상담이었다. 퇴사하기 바로  상담에선 한껏 신나 있었으니, 아이러니했을 거다. 눈물 콧물  쏟아내면서 펑펑 우는 내게 티슈를 건네려는데 티슈 곽이 비어있었다. 당황한 선생님은 허둥지둥  티슈 곽을 한참 찾더니 겨우 열어 티슈를 퍽퍽 뽑아 나에게 건넸다.  장면이 기묘하게 코믹했다. 우습게도 나는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여간 퇴사하고 나서 오히려 더 사는 게 지겨워졌다. 계속 오는 러브콜, 면접 제의, 퇴사한다고 끝난 게 아닌 사회생활, 회사를 다니지 않고서 어떻게 이 약한 몸으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글을 써야 하는데 키보드가 날 잡아먹을 듯한 기분, 복잡했다.


선생님은 긴급 약과, 푹 잘 수 있는 수면제를 소량 추가해주셨다. 그리고 3주의 텀을 1주일로 당겼다. 1주일 만에 다시 평정을 되찾은 나를 보며 선생님은 안도했다. 어쩌겠어, 다시 살아야지.






이 와중에도 회사에서의 러브콜은 쏟아지고 있고, 각종 면접 제의, 외주 제의들이 넘쳐나고 있다. 사회생활이 지겨워서 회사를 관뒀지만 그렇다고 사회생활이 끝나지는 않았다.

2주 동안 카톡을 밀고 인스타를 비활성화했다. 내 생일이 끼어있던 때였다. 어떻게 알고서들 그렇게 선물을 보내고,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아, 드디어 깨닫고 말았다. 사회생활을 그만둘 수 있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와 단절될 수는 없다. 머리 밀고 절로 들어가는 선택을 할 게 아니라면. 아, 괜히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겠어.


야생에는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피라미드 위에 있는 동물이 가장 최상위 포식자로, 아래 단계 먹이들을 줄줄이 먹어야 생태계가 돌아가는 시스템. 잔인하지만 당연한 자연의 섭리. 그 피라미드 속에서 나는 가장 아래 단계, 최약체였다. 맹수들이 드글대는 사회에서 나는 풀이나 뜯는 초식동물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나보다 강한 육식동물이 나타나면 잡아 먹히거나, 아니면 죽도록 도망치거나.

그러다 벽으로만 생각했던 문을 마침내 열고  설국열차처럼, 나는  피라미드 자체를 깨고 나왔다. 그러자 나는 벌꿀 오소리가 되었다. * 벌꿀 오소리는 원하는 일을 쟁취해내는 일에 거침이 없다. 몸집은 작지만 잡식성이고, 겁이 없어 자기보다 덩치가  동물, 예를 들면 사자나 표범과도 싸움이 붙으면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는 동물이다. 사자도 코브라, 살모사 같은 독사는 피해 다닌다고 하지만 벌꿀 오소리는 오히려 그들을 사냥한다. 특히 벌꿀을 좋아해 벌집까지 먹어치우는데,  과정에서 벌에 이거나 뱀독에 쏘여도 두꺼운 가죽과 피부, 그리도 독에 대한 내성이 충분해  시간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진단다. 아마 몸집이 컸더라면 충분히 피라미드 상위 자리를 차지할  있을만한 동물이었을 테다. 2002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없는 동물이란 타이틀로 기네스북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런 글을 읽고 나니, 나는 몸집이 작았을  토끼는 아닌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꿀 오소리였던 거다! 거침없는 공격성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협적인 상대에게도 위축되지 않는 용감한 동물. 단지 지금은 그냥 코브라의 독에 취해  시간 정도 자야하는 상태가   뿐.


며칠을 속세와 단절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니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는지, 점차 페이스를 되찾아가는 중이다. 지금은 외주 미팅도 그럭저럭 해내고, 글도 그럭저럭 쓰고 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생각하니 처음 보는 부장님들에게도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더 당차게 할 말을 한다. 유일하게 지금 이 시간을 감내해내며 얻은 좋은 점이랄까. 직장생활에선 어느새 눈치 보는 나에 질렸는데, 프리로 전향해 피하고 싶은 건 적당히 피하고 피할 수 없는 일엔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사니 다시 점점 살만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기회가 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고, 친구든 일이든 카톡도 2-3일 만에 확인해 답장을 하는, 멀리서 보면 시쳇말로 싹수없는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 입장에선 소통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남들보다 세네 배의 에너지가 든다. 그저 토하듯 글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이러다 보면 저런 날도 온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을 믿는다. 내가 끝이 없는 동굴이라 느꼈던 시간들도 인내하다 보면 결국 저 멀리서 빛 한줄기 보이는 터널이었다. 이 시간도 터널이라 생각한다. 언젠가는 빠져나올. 그러니 다시 세상으로 나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라 굳게 믿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평생 나를 움직이게 했던 ‘나아가자’란 말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은 ‘존버’하는 시간으로 결정했다.

나다운 나로 돌아오면, 다시 나아갈 수 있겠지. 결국 나는 참지 않는 벌꿀 오소리니까.


(*참고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zARRZUALq1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