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보세요.”
“어, 대니얼 킴 박사. 날세.”
“네,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내가 자네와 재원이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데, 지금 바쁘지 않으면 내 사무실로 건너오겠나?”
“하실 말이요? 네, 알겠습니다. 둘이 같이 가면 되죠?”
“응.”
“교수님, 재원이는 잠시 머리 좀 식히겠다고 밖에 나가 있어서 재원이 들어오는 데로 바로 건너가겠습니다.”
“알았네. 급한 일은 아니니까 재원이 올라오면 같이 오시게.”
“네. 그렇게 할게요.”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에게 지금 재정적 문제가 있어서 봐하이트 프로젝트를 잠시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을 꺼내려고 하니 다소 걱정이 앞선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을지라도 프로젝트를 잠시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까지는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괜히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대외적으로 소위 정치활동을 잘하는 교수들처럼 돈이 나올만한 곳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야 했나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내 능력과 관심도에 상관없이 돈이 되는 연구들을 꾸역꾸역 받아왔더라면 유용할 수 있는 연구비가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똑똑똑, 사무실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고는, 곧 이어 대니얼 킴 박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저희 왔습니다.”
“어. 대니얼 킴 박사 여기로 와서 앉게. 재원이도 같이 앉고.”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는 쇼파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간이냉장고에서 병음료 2병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며 그들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교수님, 저도 잘 마시겠습니다.”
“혹시 초콜릿도 좀 먹겠나? 얼마 전에 큰 봉지로 사 놓은게 있는 데.”
“저는 괜찮습니다.”
“재원이는?”
“교수님, 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교수님?”
“어. 그게 말일세.”
나는 대니얼 킴 박사의 질문에 바로 답변을 하기가 어려웠다.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는 내가 말을 이어가기 전까지 말없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대니얼 킴 박사, 그리고 재원아.”
“네.”
“네, 교수님.”
“안타깝게도 우리, 프로젝트를 잠시 중단해야 할 것 같다네.”
“아니,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는 순간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킴 박사는 아마 얼마 전부터 눈치를 채기는 했을 거야. 연구비 문제 말일세.”
“네, 연구비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죠.”
“맞아. 그런데 연구비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바닥이 났다네. 그래서 연구비 지원을 어딘 가로부터 받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
“이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과제를 수탁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의 사재와 학교의 지원금을 일부 사용해서 진행하다 보니, 제가 연구비가 얼마나 남았고 또 얼마나 사용했는지를 한 번도 확인하지 못 했네요. 미리 연구비 상황을 알았더라면 조절을 했을 텐데요.”
“조절하고 자시고 할 정도의 연구비가 아니었지. 괜히 내가 더 미안하게 그러지 않아도 되네, 킴 박사.”
“그래도요.”
“연구비를 미리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한 내가 잘못이지. 둘에게 미안하네.”
“교수님,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제 프로젝트를 아예 진행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야, 재원아. 추가 연구비를 확보할 때까지 잠정 중단이야.”
“얼마나 중단이 되는 것이죠, 교수님?”
“글쎄. 재원이 네 질문에 확답하기가 어렵네. 그래도 한 달은 넘기지 않도록 할 테니까 나를 믿고 조금 기다려 주게. 대니얼 킴 박사도.”
“교수님, 한 달 정도면 연구비 문제 해결이 되시겠어요?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기초연구 연구비를 받기까지 연구를 다시 중단 없이 진행하려면 적어도 몇 천만 원은 확보하셔야 할 텐데요.”
“킴 박사 말대로 쉽지 않을 거라네. 그래도 노력해 봐야지. 프로젝트가 2~3달 동안 중단되지 않도록 말일세. 프로젝트가 너무 오래 중단되어 있어도 문제가 될 테니까.”
“뭐 일단은 교수님께서 외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오시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러면 저와 재원이는 그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 가지고 있는 샘플들은 다음 주 초면 실험이 다 끝날 것 같은데요.”
“재원이야 현재 봐하이트 프로젝트 시작 이전부터 나랑 진행하고 있던 과제 계속 진행하면서 수업을 들으면 되고. 자네는 실험실에서 할 일을 해도 좋고, 아니면 프로젝트가 다시 진행될 때까지 다른 일을 해도 괜찮다네.”
“저는 그러면 지금 남은 샘플들에 대한 실험까지만 마치고 프로젝트 다시 진행될 때까지 외부에서 지내고 있을게요. 물론 부르시면 상황 봐서 바로 오도록 할 거고요.”
“킴 박사는 외부에서 지낼 곳은 있는 거야”
“한 동안 제가 속한 밴드 활동에 참여를 못 하여서 이참에 가서 좀 연습도 좀 하고 공연도 좀 하려고요.”
“홍대 쪽에서 활동하는 밴드 말하는 것이지?”
“맞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그리 알고 다음 주 남은 샘플들 실험이 끝나면 잠정 중단을 하세나. 나도 오늘부터 부지런히 발품 팔면서 연구비 지원을 받으러 다니도록 할 테니.”
“저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나 확인해 볼게요.”
“그래주시면 고맙고, 킴 박사.”
이렇게 대화를 끝마쳤다. 그래도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가 크게 실망하지 않고 상황을 이해해주니 다행이다. 물론 재원이는 많이 맥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가급적 빨리 추가 연구비를 확보하는 일이다. 솔직히 막막하다. 그래도 막막한 내색을 할 수는 없다. 총괄책임자인 내가 그러한 내색을 한다면 대니얼 킴 박사와 재원이의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가 크게 꺾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0
봐하이트 프로젝트를 중단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대니얼 킴 박사는 내게 말한 것처럼 주로 홍대에 위치한 밴드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추가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간간이 나의 부탁으로 특강을 해주는 것도 대니얼 킴 박사의 활동들 중 하나이다. 내게 실망의 기색 없이 그리고 별다른 불만 없이 믿어주며 함께하는 것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재원이에게는 봐하이트 프로젝트의 잠정 중단이 적지 않게 실망을 안겨준 것 같다. 내가 사정을 털어놓은 이후로 의욕이 없는 표정으로 실험실에서 생활을 하더니만, 결국은 모든 연락을 끊고서 잠적해버렸다. 연락이 도통 닿지를 않으니 달래줄 수도 없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이대로 학교와 실험실을 떠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내가 재원이에게 화가 난다거나 실망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은 내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어야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재원이가 얼마나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관심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봐하이트 프로젝트의 구상과 제안, 시작은 내가 했지만, 나와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후 재원이는 나보다 더욱 많은 기대와 관심, 열정을 이 프로젝트에 가졌다. 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재원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어릴 적부터 자주 경험하고 있는 예지몽과 데자뷰, 일종의 빙의 같은 현상들 때문이다. 재원이는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큰 사람이다. 내 가설을 처음 접했을 때 그의 모습은 그래서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도대체 재원이는 어디로 떠나버린 걸까? 아무리 실망이 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한 마디 없이 잠적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재원이 이 녀석 나쁘게 평가하면 저만 아는 이기주의자다. 여기서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나와 대니얼 킴 박사가 걱정하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제 기분대로 이렇게 훌쩍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녀석 돌아오면 한 번은 따끔히 혼을 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이런 상황을 되풀이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재원이 이 녀석 별일 없이 무탈하게 속히 돌아왔으면 좋겠다.
#11
일주일이 또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재원이는 아직 이다. 사무실 창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내 마음과는 너무 상반되게도 눈이 부시다. 잠시 후에 실험실에 들려봐야겠다. 실험실 청소와 정리를 할 겸해서 말이다.
#12
“어! 재원아!”
실험실에 도착한 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원이가 실험실에서 홀로 무엇인가를 하며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나를 마주한 재원이는 무표정한 모습과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재원이의 인사를 받자마자 그의 그러한 태도 때문인지 기분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재원이 너 왔으면 사무실로 찾아오던가, 전화를 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네 걱정을 했는지 아니!”
“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어디를 그리도 오래 가 있었던 거야?”
“네, 없습니다. 그냥 나름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아. 어찌되었든 이렇게 다시 왔으니 됐다.”
“네.”
“혹시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나랑 학교 근처에서 점심식사 같이하자.”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 오후에 외부에서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식사 따로 하고 먼저 가보도록 할게요.”
“어? 그래!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자구나.”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사무실로 왔다. 녀석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이렇게 침체되고 어눌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