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재원이 녀석 오늘도 실험실에 와 있겠지?’라는 궁금증 어린 걱정으로 나는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 다행히 오늘도 실험실에 나와 있다. 그런데 무엇을 저리도 집중해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재원이가 다시 돌아와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지만, 궁금증도 생긴다. 지금 봐하이트 프로젝트는 실험할 수 있는 샘플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프로젝트가 잠정 중단이 된 상황이고, 다른 프로젝트들도 현재 실험을 요구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인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재원이에게로 다가갔다. 다행히 내가 근처에 다가갈 때까지 재원이는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재원아, 뭘 그리 열심히 하는 거니?”
나는 재원이 곁으로 다가간 후 말을 건넸다. 재원이는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잡고 있던 실험용 집기구와 샘플을 떨어뜨렸다.
“원 녀석, 왜 이렇게 놀라.”
“아, 교수님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 들어오셨어요?”
“방금 들어왔지. 그런데 무엇을 하는 데 그리도 집중해서 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냥 뭐…….”
재원이는 바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말을 빙빙 돌리며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하고 수상쩍었지만, 재원이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추궁성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재원이가 다시 잠적을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원이가 불편하지 않게 그의 왼쪽어깨에 내 손을 살포시 얹으며 토닥이고, “내가 괜히 놀라게 하고 불편하게 했나 보네. 수고 좀 해주고.”라는 말을 건넨 후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14
오후 5시가 다 되어간다. 오늘 아침 실험실에서 마주했던 재원이의 모습이 아직까지 머릿속을 맴돈다. 재원이가 무엇을 그렇게 집중해서 하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히 봐하이트 프로젝트를 위한 실험장치도 켜져 있었다. 손에 들고 있었던 것도 그 장치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샘플 같았다. 그런데 지금 봐하이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샘플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분명히 그렇다. 그렇다면 재원이가 어디에서 샘플을 구해 왔다는 것인가? 그 샘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떠한 샘플이었기에 그렇게 화들짝 놀랐던 것일까? 모든 것들이 궁금해진다.
내가 직접 재원이를 불러서 물어보면 불편해하거나 어려워 할 수 있으니, 대니얼 킴 박사에게 부탁을 해봐야겠다. 시간이 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와서 재원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봐하이트 프로젝트 실험을 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무슨 샘플을 사용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해달라고 말이다. 재원이가 나보다는 대니얼 킴 박사를 덜 불편해 할 테니까.
#15
“여보세요.”
“나일세. 찰리 우드.”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내가 자네한테 부탁을 할 게 있어서 전화를 했네.”
“부탁이요? 어떤 부탁이신지.”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재원이 관련해서 부탁을 좀 하려고.”
“재원이요?”
“응.”
“재원이 돌아왔어요?”
“그렇다네. 어제 돌아왔다네. 자네한테도 말해준다고 하다가 어제 깜빡하고 이제야 부탁전화 하면서 말하게 되네.”
“재원이 별일 없었데요?”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런데 녀석 좀 어두워졌어. 말수도 줄어들고. 아니면 나랑 있기가 불편해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설마요.”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내가 재원이 지도교수 아닌가. 지도교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한 달여 동안을 잠적했었으니, 저 딴에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교수님,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하시려는 거죠? 말씀해 주세요.”
“재원이가 어제, 오늘 실험실에서 혼자 어떤 샘플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을 내가 봤다네.”
“실험이요? 혼자서요?”
“응.”
“혹시 지금 다른 프로젝트도 진행하시는 것이 있으시잖아요. 그거 하고 있던 건 아니고요?”
“현재 실험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는 없다네. 그런데 재원이가 실험을 하고 있어서 무엇인지 궁금하다네.”
“교수님께서 재원이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그럴까 했는데, 녀석이 나를 불편해 하는 모습이 보여서 말이지. 괜히 물어본다는 것이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해서 다시 잠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자네가 내일 시간이 된다면 실험실에 와서 재원이와 대화를 좀 하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을 해주면 좋겠네.”
“교수님 부탁인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내일 제가 실험실로 찾아갈게요.”
“고맙네, 킴 박사.”
“별 말씀을요.”
“그럼 내일 보세나.”
“네, 내일 뵙겠습니다.”
#16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린다. 오늘 같은 날 다행히 외부 일정은 없어 비를 맞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오전 9시까지 내 사무실로 오겠다던 대니얼 킴 박사는 20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다. 비가 와서 좀 늦는 것인가? 하긴 비가 오면 서울 시내의 교통이 전반적으로 정체되고 느려지기는 하니까. 지금 어디 쯤 오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나의 부탁으로 오는 것인데 전화를 했다가 괜히 지각을 한다고 나무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 같아서 꾹 참고 있다. ‘대니얼은 매사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 곧 오겠지.’ 마침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저 왔습니다, 교수님.”
“어, 들어오시게.”
“네.”
“오는 데 차가 좀 막혔나 보지?”
“아니요. 실험실에 좀 들렸다 왔습니다.”
“실험실에?”
“네.”
“그래서 조금 늦었구먼.”
“네. 시간 맞춰서 왔었는데요. 먼저 실험실에 들려서 재원이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재원이를 만났나?”
“아니요. 재원이가 없던 걸요.”
“그래?”
“아직 실험실에 오지 않은 걸 모르고 계셨나 봐요?”
“그렇다네. 사실 내가 실험실 확인을 안 하고 바로 사무실로 왔거든.”
“그러셨군요. 저는 재원이가 없어서 실험실에서 좀 기다리다가 늦어지는 것 같아서 건너 왔습니다.”
“바쁜 일 없으면 나랑 사무실에서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재원이 오기를 기다려 보지 뭐. 커피하고 녹차만 있는데. 어떤 걸로 마시겠나?”
“저는 커피 마시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탕비실에서 물을 끓이고 커피 두 잔을 탔다. 제법 커피 냄새가 향긋하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교수님.”
“자, 마십시다.”
“네.”
“재원이 녀석 오늘 나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혹시 재원이가 오늘 못 나올 것 같다고 교수님께 말을 했었나요?”
“아니. 없었어.”
“그러면 나오겠죠. 무슨 일이 있어서 좀 늦는 것일 거예요.”
“그렇겠지?”
“네. 교수님 궁금하시면 제가 재원이에게 전화해 볼까요? 무슨 일이 있어 늦는 거냐고?”
“그래주겠나?”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지금 전화해 볼 게요.”
대니얼 킴 박사는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재원이의 연락처를 잠시 간 찾더니 통화연결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재원이에게 전화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차례 대니얼 킴 박사는 재원이에게 전화연결을 시도했지만, 그 연결은 실패하고 말았다.
“교수님, 재원이가 전화를 안 받는 데요.”
“녀석, 혹시 다시 잠수를 타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이랬던 녀석이 아니었는데. 프로젝트 잠정 중단이 된 이후로 계속 이러네. 걱정이 되게 말이야.”
“뭔가 사정이 있겠죠.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해볼게요.”
“고맙네, 대니얼 킴 박사.”
“별 말씀을요. 참, 커피 마시고서 제가 실험실에 다시 가볼게요.”
“실험실에?”
“네. 실험실 재원이 자리에 가서 데이터나 사용한 샘플을 좀 찾아보려고요. 교수님께서 궁금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재원이가 없으니 제가 재원이 자리에 가서 한 번 확인해 볼게요.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이죠.”
“나도 같이 가서 확인해 볼까?”
“교수님은 사무실에 계세요. 저 혼자 가서 찾아볼게요. 혹시나 재원이가 중간에 와서 저희 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불편해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부탁하네.”
“저는 커피를 다 마셨으니 지금 실험실에 가볼게요.”
대니얼 킴 박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향했다. 많은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비가 좀처럼 쉽게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 대니얼 킴 박사가 사무실을 나가고서, 분위기가 가라 않는 기분이 든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니 나도 제법 나이가 들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괜한 우울감이 밀려온다. 커피는 달면서도 쓰다. 내 인생을 맛볼 수 있다면 아마 이러한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따라 괜히 감상적이다. 나이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말하기를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지 않던가. 그만큼 센티멘털 해진다는 말일 게다.
#17
대니얼 킴 박사가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실험실에서 재원이가 실험에 사용한 샘플이나 실험의 결과로 얻은 데이터 그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재원이의 PC와 책상, 실험실의 모든 폐기물 처리함을 뒤져보았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재원이는 최근 자신이 돌아와서 개인적으로 실험한 샘플들과 자료들을 남기지 않고 처리를 한 것 같다. 대니얼 킴 박사는 도대체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기에 평소 정리를 잘 하지 않던 녀석이 이리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실험을 진행한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간다고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다.
재원이가 내게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괘씸하다. 지극히 사적인 일을 한다면야 내가 괘씸해할 필요는 없지만, 실험실에서 어떠한 실험을 진행하면서 지도교수이자 연구책임자인 내게 무엇을 숨긴다는 것은 여간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느껴진다. 나 스스로는 여느 꼰대 교수들처럼 굴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노력했지만, 제자인 재원이에게 나 역시 그러한 교수로 여겨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도교수인 나 몰래 무엇인가를 진행하고 또 그것을 숨기려 하겠는가.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하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오후 반차를 낸 후 대니얼 킴 박사와 막걸리나 마시면서 기분을 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