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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시작 #4~6

by 작가C

#4

세미나는 나의 발표를 시작으로 오후 6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발표와 질의응답, 토론으로만 꽉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각 발표가 시작되기 이전에 짧은 휴식시간을 가졌고, 오후에는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점심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도 전체적인 진행시간을 보면 짧지 않은 학술세미나였다. 벌써 석양이 지려고 한다.

“채정길 박사.”

내 이름을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서 큰 목소리로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아름 박사였다. 그녀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연구자이다. 그리고 내 수행하는 연구들을 지지해주고 도와주는 멘토이기도 하다.

“어. 이 박사.”

“오늘 세미나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수고 많았어.”

“세미나 준비는 사실 이우정 씨가 다 해줬어.”

“그래도 세미나 계획하고 발표자료 준비하고 진행까지 했으니 수고 많았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별 말씀을. 호호호.”

“오늘 세미나는 괜찮았어? 자기 분야에 대한 연구자 발표는 오늘 없었지?”

“응. 그렇긴 해도 오늘 채 박사 발표 재밌었어. 흥미롭더라고.”

“그렇지?”

“응. 사실 채 박사가 개발한 제올라이트 소재만큼 이산화탄소 흡착효율을 높게 가지기는 어렵잖아. 그래서 분리막이나 하이드레이트화 하는 방향으로 기술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오, 정확히 알고 있네?”

“그럼. 내 분야는 아니더라도 관심가지고 있는 연구인걸.”

“지금까지는 Lab. scale에서의 연구여서 나름 소재를 쉽게 컨트롤 할 수 있었지만, 후속해서 실증화를 거쳐 상용화 기술로 이어지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단계의 연구가 진행 되면, 우선 계산화학 기법을 이용해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런데 우리 연구실에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이 박사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

“그래? 나야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

“고마워.”

“대신에 맛있는 밥 사줘.”

“도와준다면야 어디 밥뿐이겠어?”

“그래? 또 뭘 주려고?”

“커피하고 디저트까지 사줘야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치. 난 또 무슨 선물이라도 주려는 줄 알았네.”

“나중에 봐서. 하하하.”

“이 박사,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들어갈 거지?”

“그럼, 들어가서 정리를 도와줘야지.”

“자, 들어갑시다.”

이아름 박사와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러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 특유의 성격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성으로서, 즉 여자로서 느껴지는 않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친구로서 또 동료로서 지내고 싶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아름 박사와 나는 바로 세미나가 이루어졌던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이우정 씨와 직원들은 벌써 뒷정리를 거의 다 해놓은 상태였다.

“우정 씨, 벌써 정리가 다 된 거야?”

“그럼요. 사실 정리할 게 별로 없었어요. 저희 물품만 챙기면 되어서요.”

“여기 청소는 이곳 직원들이 해주는 건가?”

“쓰레기만 주워서 저기 밖에 큰 비닐에 모아 놓으면 된데요. 그런데 오늘 참석하신 분들이 바닥에 컵 등을 버리고 가지 않아서 주울 것이 별로 없어요.”

“다행이네.”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박사님은 먼저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다 끝낼 때까지는 내가 있어야지.”

“도와주실 일이 없는 데, 뭐 하러 그러세요.”

“괜히 미안한데.”

“미안할 거 없으세요. 내일 뵐게요, 박사님.”

“오케이. 그러면 내일 봅시다. 마무리 잘 부탁하고.”

“걱정 마세요. 그리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그렇게 이우정 씨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서 이아름 박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새 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 박사.”

“응.”

“배고프지?”

“아무래도.”

“밥 먹으러 가자. 저녁선약 없지?”

“응, 없어. 어디로 갈꺼야?”

“요 근처 쌀국수집 어때? 거기 지난번에 가보니까 맛있던데.”

“오케이. 그러면 그리로 가.”

우리는 그곳,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지금은 가을로 접어드는 문턱, 즉 여름의 끝자락이어서 그런지 밤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여름 동안 흐릿했던 밤하늘의 별빛들도 제법 선명해졌다. 참 좋은 날이다.


#5

오늘따라 실험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계속 해왔던 실험이고, 실험의 조건도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와야 하는 결과가 오늘따라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날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게 된다.

화학물질을 다루는 공학자들은 화학물질을 다룰 때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사람 손을 탄다는 말을 말이다. 생물을 다루는 사람들인 경우에야 실제로 생물이 사람의 손을 타면서 행동이나 생각의 패턴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사람 손을 탄다는 말이 맞는 말일 수 있다. 생물이 아닌 무생물인 화학물질을 다루면서 사람 손을 탄다는 말을 한다면 뭔가 이성적이지 않은 것 같다. 분명 그렇게 생각해야 일반적이다.

나처럼 화학물질을 직접 다루어본 사람들만이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람 손을 탄다는 말의 의미를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 말은 실제 경험되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 지금보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더욱 많이 이루어진다면 그 현상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세한 규모에서의 어떠한 변화가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일 테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실험의 문제를 나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실험을 이어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연구실에는 나 혼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이 연구실에는 연구진이 나를 포함하여 총 네 명이다. 두 명은 박사과정 학생 신분의 연수생들이고, 한 명은 별정직 연구원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연구비를 운용하고 있는 연구실의 경우에야 박사급 정규직 연구원들이 여럿 있지만, 내가 맡고 있는 연구실의 경우 연구비 규모가 크지 않아 그러하지 못하다. 어쩌면 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세 명의 인원들을 두고 있는 현 상황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한 연구실들도 태반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오늘 나와 함께 실험을 진행해주어야 할 이들이 각자의 개인사정이 생겨서 출근을 못하게 되었다.

오늘은 실험을 일단 접어야 할 것 같다. 안 되는 실험을 계속 붙잡고 있어봐야 시간과 재료만 사용하고 결과는 여전히 엉망인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군에서 기인한 이 말은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끈기와 노력을 강조하는 말로서, 육체적 반복 숙달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제발 잘 맞는다. 하지만 정교한 고난이도의 과학기술이 요구되는 연구에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안 되는 실험은 그 문제점의 파악과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계속 매달리고 있어봐야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길 건너 카페에 가서 시그니처초코릿을 사먹어야겠다. 아무 생각 없이 달달한 음료를 마시는 것,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6

“시그니처초코릿 시키신 손님, 여기 나왔습니다.”

나는 점원에게서 시그니처초코릿을 받아 창가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한 모금을 마셔본다. 달콤한 맛과 향이 진하게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이제야 기분이 좀 전환되는 느낌이다.

사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제니 킴을 만난 이후로 그 입맛이 바뀌었다. 사실 바뀌었던 것은 입맛뿐이 아니었다. 미술품 감상과 뮤지컬 관람, 오랜 시간 동안의 산책 등도 그녀로 인하여 생긴 취미와 습관이다.

제니 킴,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다. 그것도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 만나게 되었던 첫사랑 이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해보면 인연 또는 운명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정말 운명처럼, 내와 인연이 되었던 여자였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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