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녀는 나와의 여행에서 죽었다. 그녀는 1년 전 나와의 여행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후회를 해봐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을 제안했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녀와의 연애기간이 1년이 훌쩍 지나가면서 그녀를 내 인생의 반려자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라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고, 나 역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우리 둘만의 여행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의 제안을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민은 한 이틀 정도 계속 되었다. 그러한 모습은 당연했다. 한국에서 어느 여자가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오가기 이전에 선뜻 여행을 허락하겠는가. 그것도 2박 3일이라는 기간 동안 단둘이서 하는 여행을 말이다. 물론 소위 발랑 까진 여자들은 예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나와 여행을 결심했다. 단, 여행을 다녀온 이후 결혼을 진행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내가 그녀에게 깜짝 청혼을 하고자 계획했던 여행이, 본의 아니게 청혼을 해야만 하는 여행이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했다. 게다가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바다 위로 부서지던 햇살,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아오르던 갈매기, 간간이 불어오던 포근한 바닷바람. 당시 그 모든 것들이 나와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8
연애를 1년 넘게 했지만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적은 없었다. 요즘이야 연애를 하면서 잠자리를 갖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나와 제니 킴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연애를 하는 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나 제니 킴이 성욕이 그다지 왕성하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섹스리스 커플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일종의 미신과 같은 믿음 하나를 믿고 있었을 뿐이다. 깊게 사귀는 연인이 결혼 전에 잠자리를 가지면 인연이 오래 못 가서 깨진다는 세간의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여행 2일째 밤이 되자 우리는 서로를 갈구하는 욕망을 더 이상 자제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몸 안에서 그녀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고, 그녀 역시 나의 그 마음을 받아주고자 결심한 것처럼 보였었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던 그녀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던 몸의 떨림, 가파른 숨결, 점점 붉게 번져가던 얼굴의 홍조. 그녀의 그것들이 점점 강렬해지고 커지고 있음을 나는 볼 수 있었고, 또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가벼운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진한 키스로 변해갔고, 나는 그녀의 남방셔츠를 차분히 벗긴 후 브래지어를 벗겨내었다. 그녀도 나의 남방셔츠를 차분히 벗긴 후 벨트를 풀어 바지를 벗겨버렸다. 그리고 서로에게 남아 있던 속옷은 각자가 급하게 벗어버렸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그 모습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아름다웠지만, 사실 나는 모든 순간마다 서툴렀다. 우리가 몸으로 나누었던 시간이 내게는 제법 길게 느껴졌지만, 시계는 겨우 4분이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계를 본 후 거세게 밀려오는 무안한 감정은 나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그러한 내 모습을 보며 제니는 까르르 웃으며 “이게 뭐야.”라며 나를 골렸었다. 그러나 이내 나를 꼭 끌어안아 주면서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다. 잠시 밀려왔던 무안한 감정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행복한 느낌만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왼쪽 팔을 베고서 누웠었다. 우리가 묵고 있던 방은 한 동안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지만 분홍빛 온기가 가득했었다. 제니 킴은 나를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린 후, 곧이어 말을 건넸었다.
“오빠, 나 사랑해?”
“그럼, 당연히 사랑하지.”
“얼마나?”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래도 표현해봐.”
“네가 볼 수 있는 세상보다 더 크게 사랑해.”
“아이 뭐야. 느끼하잖아. 호호호.”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사실인데 모.”
“좋아. 나는 오빠보다 조금 작게 사랑해.”
“치. 왜 제니 것은 작아?”
“나는 오빠가 더 나를 사랑하는 게 좋아.”
“그게 모야. 하하하.”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오빠.”
“응?”
“참 신기해.”
“어떤 게?”
“그냥, 다.”
“…….”
“내가 오빠를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다 신기해.”
“나도 그래.”
“오빠는 신기한 게 아니라 땡 잡은 거지.”
“땡?”
“그래. 어디서 나 같은 미인을 만나겠어. 게다가 마음도 예쁘고.”
“하하하. 오케이. 인정!”
“치. 호호호”
“우리 처음 만났던 곳, 강남 영어동아리 기억나지?”
“그럼. 당연하지.”
“그때 생각을 하면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봐.”
“제니는 그런 것 잘 안 믿잖아.”
“응. 그런데 그런 게 있기는 있는 것 같아.”
“하긴, 당시 생각해보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
“응.”
“영어동아리 수업이 끝나고 그때 그 오빠가 카톡방 만들어서 수시로 영어대화 하면서 공부하자고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치?”
“맞아. 그때 그 형 덕분에 서로들 연락처 주고받으면서 제니 연락처도 받게 되었으니까.”
“오빠 그때 참 순수해 보였어.”
“내가 순수해 보였어?”
“응.”
“왜?”
“그냥 전체적인 느낌이 그랬어. 전역한지 얼마 안 된 군인이어서 그랬는지 말과 행동 뭔가 좀 어색해 보였는데, 나는 그 오빠 모습이 순수해 보이더라. 귀엽기도 했었고.”
“내가 귀여운 얼굴은 아닌 데, 설마.”
“내 눈에는 그랬다고, 바보야.”
“그래, 고마워.”
“그리고 오빠 그때 공부하는 중이었잖아. 대학원에서 말이야.”
“그랬지.”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공부하는 남자가 어딘지 모르게 멋있고 섹시해 보여.”
“그 말은 우리 세 번째 데이트 했던 날 내게 했었다.”
“맞아.”
“엉큼하게 오빠가 골목에 데려가 키스했던 날.”
“솔직히 엉큼하지는 않았다. 치.”
“엉큼했지. 그날 일부러 데이트 장소들을 모두 후미진 골목으로 잡았던 거 아니야?”
“아니, …….”
“이봐. 맞잖아. 그러니 대답을 잘 못하지.”
“치.”
“그래도 그때 괜찮았어. 그날부터 우리 진짜 사귀기 시작했잖아.”
제 눈에 안경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 것일까? 혹은 짚신도 짝이 있다는 표현을 써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표현들 말고는 제니와 내가 사랑하게 되었던 이유를 아직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예전에는 믿지 않았던 운명, 인연, 이러한 말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곁에 누워서 장난을 치고 있었던 그녀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다시 포갰었다. 그녀도 다시 나를 갈구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녀는 그녀의 혀로 나의 혀를 부드럽고 매끄럽게 보듬어 주었고, 따뜻한 숨결을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마치 태초에 신이 자신이 빚은 찰흙 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듯이.
나는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금기가 깨지면서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허락되는 느낌이었다. 자유로움, 해방감, 행복, 즐거움, 기쁨, 그 모든 것들을 말이다. 내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나는 광활한 우주에 포근한 햇살을 오롯이 맞으며 자유롭게 유영을 하는 것 같았다. 신이 존재 한다면, 마치 신의 품안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간간이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체액 내음은 마치 그리스 신들의 넥타르 향기처럼 느껴졌었다. 그 시간 안에서 나를 영원이 살도록 할 것 같았으며,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한껏 상기된 표정이 되었을 대 제니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오빠, 오빠 손으로 내 목을 가볍게 조여 줘.”
“어?”
“내 목을 가볍게 조여 달라고, 오빠.”
나는 그녀의 부탁에 순간 생각과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몸 위에서 바보라도 된 것처럼 한동안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오빠, 나는 괜찮으니까 내 목에 오빠 손을 올리고 살짝 조여 봐.”
“너 그러다 잘 못 되면 어떡해.”
“그러니까 살짝만.”
“내가 꼭 해줘야만 하는 거야?”
“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겁이 나서 그래. 잘 못 될까봐.”
“살살하면 잘 못 될 일이 없으니까. 걱정 말고 해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느낌인지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말이야.”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부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나는 그녀의 가녀린 목에 내 두 손을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또 조심스럽게 나의 중심을 그녀의 몸 안으로 밀어 넣고 빼기를 반복하기 시작하였다. 제니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고, 나와 교감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던 탓이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더욱 크고 진하게 생겨나고 있었다.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었다. 당시의 그 기분을 말로써 설명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겁이 나면서도 대담해지고 싶었고, 행복하면서도 불안하게 느껴졌었다. 동시에 여러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이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점점 몰입되어 갈수록 긴장감과 불안함도 커져갔기 때문이다. 혹시나 내가 기분에 취해 온 몸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여, 또 이성이 잠시나마 마비되어 제니를 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온 신경은 그녀의 목을 살며시 조르고 있던 내 두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그녀와 깊게 교감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