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빠, 조금 더 세게.”
제니의 그 말은 내 안에 깊게 묻혀 있던 무엇의 봉인을 풀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나는 내 몸에서 머리까지 이어지는 쾌락을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목을 얼마나 세게 조이고 있었는지, 또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 했었다. 그 순간마다 전해지는 쾌락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나버린 폭주기관차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더는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목을 부여잡고서 그저 사정의 순간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었다. 사정이 끝났고, 나는 그녀가 죽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제니는 입가에 옅은 미소만을 남긴 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10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나를 부른 것은 이아름 박사였다. 내게 왜 카페에 와서 땡땡이를 치고 있느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고서 내 옆에 앉았다.
“어, 이 박사. 자기는 여기 어쩐 일이야?”
“음료 하나 사먹으러 왔지. 그런 채 박사는?”
“실험이 잘 안 돼서.”
“뭐가 어떻게 잘 안 되기에 그렇게 정신까지 놓고 있었어?”
“실험 때문에 넋 놓고 있던 건 아니고.”
“들어갈 거야?”
“들어가 봐야지.”
“그럼 내 음료 나오면 같이 들어가자.”
“그럽시다.”
한 3분 정도가 지나 이아름 박사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나와 이아름 박사는 나온 음료를 집어 들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다시 연구실 내 자리에 앉았다. 연구실에 와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는 나쁜 놈이다. 나는 나쁜 놈이다.’
#11
나는 제니 킴을 어느 야산에 급하게 매장했다. 아직까지 제니 킴에 대한 실종신고가 제보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야산에 매장하면 안 되었는데, 나는 너무도 두려웠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니 킴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에 버려진 고아였다. 국내에서는 아주 잠시 입양시설에서 지내는 동안만 있었고, 미국의 한 가정으로 입양된 이후로는 계속 미국에서만 지냈었다. 다행히 그녀는 유복한 양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잊으면 안 된다는 양부모님의 가치관 때문에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어린 시절부터 배울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한 이후로 전업 화가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었고, 겸업으로 소설가로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활동을 하게 된 이유는 국내 한 재단에서 그녀의 활동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니 킴은 홀로 한국에 와서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가지기 위해 강남의 영어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나는 영어를 배우려고 강남의 영어동아리 활동에 참석했었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 동아리 활동에 참석했었다.
그녀의 양아버지는 폐암 증상이 심하여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그녀의 양어머니 역시 현재 치매증상이 있어 미국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시다. 내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제니 킴의 주변 환경은 그녀가 죽은 지 벌써 1년이 지났음에도 찾는 이 하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물론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서 그녀의 실종이 신고 되거나, 매장된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어 수사기관의 수사가 시작되겠지만 말이다.
#12
현재 교재 중인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신아정이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사귀기 시작한지 벌써 4개월이 다되어간다.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아름 박사 때문이다. 이아름 박사가 그녀를 내게 직접 소개해주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5개월 전에 참석했었던 여수의 국제환경학회에서 이아름 박사와 협업을 하고 있는 P연구소의 사람들을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그녀와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P연구소의 직원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누군가와 이렇게 빨리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제니 킴에 대한 흔적들이 아직 마음속에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을뿐더러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도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아정은 제니 킴에 대한 내 안의 감정들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내게로 자연스럽게, 그렇지만 강렬하게 스며들어와 버렸다. 단지 몇 번의 만남만으로 말이다. 아름다운 외모, 외향적인 성격, 상냥하고 위트 있는 말투, 교양 있는 행동, 그녀의 그 모든 것들은 삽시간에 나를 매료시키는데 충분했다.
신아정,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그 시간만큼은 그리움, 죄책감, 미안함, 두려움 등의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편안함, 따스함, 행복 등의 감정만이 나를 채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