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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C Jun 13. 2020

인류가 죽은 자들을 보내는 문화적 기원에 대하여

(2020.06.12.~13.새벽, 꿈에서의 배움)

나는 꿈에서 배움을 얻기도 하고, 또 때로는 꿈에서 여러 날을 고민할 문제를 가지기도 한다. 시간상으로는 2020년 6월 13일 새벽쯤 될 것 같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깨달음 측면에서는 새로울 수밖에 없는 해석적인 꿈을 꾸었다.   

  

나의 그 시간 동안 꿈에서는 자연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마치 원시 인류의 모습을 한 것 같은 내가 나의 가족과 같은 너무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서 그를(혹은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그 누군가를 보내고 그를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는 곳에다 놓았다. 그리고 나는 생존을 위해서 일상을 보내고 다시 나의 그리운 그를 보기 위해서 그가 있는 장소에 도착한 순간 늑대 무리(혹은 코요테나 하이에나 무리)가 죽은 그의 살점을 뜯고 뼈를 물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너무도 슬프면서 화가 났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떻게 그 짐승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난 듯 한 장면으로 나의 꿈은 시공간을 초월했다. 나와 혈연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부족민들은 또 다시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다만 우리는 그 이전의 늑대 무리를 생각하며 그를 떠나보내는 방식을 바꾸었다.     


떠나보내는 자의 살과 뼈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현대 문명에서야 카니발리즘, 즉 식인풍습 등은 정신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행동 내지 어떠한 종교적(혹은 신념적) 행위로써 해석되고 있지만, 나의 꿈에서 원시적 삶을 살아가던 나와 그 부족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사랑했던 이가 죽어서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를 취하는 것이 더욱 덜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 이하의 의미는 없었다. 그 꿈에서 나와 부족은 떠나보내는 자의 살을 취해서 먹었고, 우리가 먹을 수 없는 뼈는 곱게 빻아서 바람과 강물에 흘려보냈다. 이로써 나와 부족은 떠나보내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장례법을 정립한 셈이었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왠지 모를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기분적으로는 어떠한 특이점이 없었다. 꿈에서 사랑하는 이의 식인을 했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찝찝함, 두려움 등의 감정은 일체 없었다. 다만, 나는 거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의 고대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튜브 어느 채널에서 나는 언젠가 어미 개가 먼저 세상을 떠난 강아지의 사체를 주인이 묻어준 곳에 찾아가 다시 땅을 파내고 그 강아지 사체를 물어 꺼내며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슬퍼하는 모습이라는 표현이 지극히 지금의 인간적인 표현일 수 있겠으나, 이 외에 달리 표현할 어휘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그 어미 개와 같은 짐승마저도 (지극히 인간적인 표현이나)사랑했던 이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보내야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화나 언어, 종교 등 그 무엇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던 당시의 인류의 기원들도 원초적인 느낌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류가 가진 사유의 방법과 경험에 토대한 지식과 사고방식을 토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원초적인 느낌과 감정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장례에 대한 문화는 그 초기 사랑하는 이들이 짐승의 공격을 받아 먹이가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했음이라고 생각한다.  


각 문화에서는 다양한 장례법을 가진다. 화장에 기반한 수목장 등과 매장, 지금은 아주 일부의 장례법이지만 식인장까지, 이것들은 현재 인류가 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례법이다. 인류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수준의 고대 인류의 장례흔적을 찾아보면, 돌무더기나 고인돌 같은 거대 암석 밑에 사체를 매장하고, 불로 태우고, 바다로 돌려보내고, 일부에서는 식인을 통해 고인을 자신에게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행위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지는지에 대한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특히 어떠한 의식적인 의미를 모두 배제하고 생각하면, 내가 그리고 나의 부족이 사랑했던 이가 짐승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목격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류가 계승하고 있는 모든 장례행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각 인류의 기원들이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그 부족단위의 사회에서 합의된 내용만 다를 뿐이다. 식인문화를 인류문화에 반한다 등의 해석은 지금도 당시도 옳지 않다. 앞으로도 옳지 않다. 그 시초를 생각하면 그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모두가 다르지 않다.     


TV 교양프로그램 중 도올 김용옥 선생이 어떤 강의를 진행하면서 “모든 종교는 인류의 기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어떠한 감정의 응축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락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초기 인류라 불리는 생명체들에게 어떠한 체계적인 신의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실체에 대한 이론 등은 분명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초기 믿음(종교의 시작이라 불릴 수 있을 듯한 그 무엇)은 자연에서 어떠한 사물이나 동·식물을 주기적으로 접하면서 받은 감정일 것이다. 어떤 초기 인류 부족이 지리산에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이상하게 A지점에 위치한 100년송 앞에서는 노루를 쉽게 잡은 경험이 있는 데, 그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초기 인류 부족이 A지점에 위치한 100년송에게서 받은 어떠한 응축적인 느낌과 감정이, 일종의 어떠한 초월적 존재처럼 생각되어지게 하고, 그것은 후일 사냥을 하러 가는 이들에게 기원의 대상이 되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기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형상을 한 신들의 종교는 그 후로, 한참 후에야 출현한다. 공유할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 체계화되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현재의 인류가 아직 고대부터 내려온 전승적 문화를 가진 인류에게 미개하다거나 반인류적이라 하는 평은 오히려 무식의 소치일 것이다. 더불어 오만의 극치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하여 생각하면, 그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그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답습하는 문화를 가진 인류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에 식인장이 필요한 환경에 노출된 인류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그러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일부 문화권에서는 초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그 이후 전승된 행위에 어떠한 의식이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전승된 행위를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어, 앞에서의 질문은 무의미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오늘 새벽의 꿈은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주말 비가 내리는 아침부터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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