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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C Sep 05. 2015

2014년 여름, 예천 용문사[#2]

소백산 중턱의 한 고찰에서 나를 돌아보다.

"예천 용문사에서의 아침을 맞다."


예천 용문사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새 소리들로 가득하다. 단, 잘 들어보노라면 아침에 우는 새와 저녁에 우는 새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에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 녀석들만 있는지 경쾌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녀석들이 울기 시작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 해가 중천에서 기울기까지는 정말 소백산에  어울린다,라는 고즈넉한 목소리를 가진 녀석들이 사찰의 처마 끝 풍경과 같이 은은하게 울린다. 그리고 저녁이 찾아와 어둠이 깊게 깔리고 나면 구욱~구욱~ 하는 왠지 모를 외로움을 돋게 하는 달빛과 같은 울음이 산중을 가득 채운다. 여하튼 아침의 상쾌한 산 공기와 같은 새들의 소리는 참 싱그럽기만 했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대장전"


예천 용문사가 창건된 이후 본 대장전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찰의 대대적인 보수작업으로 낮은 가치를 받고 있다.


예천 용문사는 두운선사가 두운암이라는 암자를 만들면서 창건된 이후 현재의 예천 용문사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사찰이다. 약 800여 년이 넘은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큰 화재 등으로 인하여 초기의 그 웅장했던 사찰의 모습은 다 보여주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현재도 사찰은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예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자 목조건물은 '대장전'이다. 대장전은 아마 추정되기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 양식이 조선불교건축물에 맞추어 지어졌고 역사적인 기록도 최초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남아 있지를 않다 보니 그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장전을 보면서 뭔가 안타까움을 느꼈다. 역사적으로 보존해야 할 것들이 제대로 이루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눈부신 아미타부처님과 삼존불을 묘사한 목각탱"


대장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의 목각탱이 있다. 아미타불의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목각으로 새겨져 있는 불교사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비롯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아미타부처님 삼존불을 묘사한 목각탱은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목각탱의 경우는 전국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의 불교적 세계관의 이야기를 목각판에 하나하나 정교하게 파서 만들고 그 표면에 금색으로 도색을 한 것이다. 이 목각판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아미타불은 구원을 하는 부처님으로서 구원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사전 등을 찾아보면 나와 있다. 아마도 예천 용문사의 당시 시대적인 역할이 중생들을 구원하는 역할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나도 예천 용문사에 있으면서 현재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제를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미타불 목각탱 옆의 윤장대, 기복을 빌다."


대장전에는 아미타불 목각탱의 좌와 우로 윤장대가 위치해 있다. 본 윤장대는 목각탱을 정면으로 했을 시 좌측에 있음. 꽃무늬 목각은 미술품 사료로도 의미가 크다고 했다.


본 사진의 윤장대는 대장전의 아미타불 목각탱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측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좌측의 꽃무늬 윤장대와는 다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윤장대를 접하게 되었다. 윤장대, 아, 이거  뭐지?라는 생각이 처음 드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절을 다니시는 이유로 나도 사찰은 종종 다녔지만 윤장대라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어 궁금증이 가득하기만 했다. 윤장대는 오래된 목조공예품으로서 현재는 사찰에서 허락이 되는 기간에만 만지고 돌려볼 수가 있다고 했다. 윤장대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하나의 기복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국의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불구(불교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되는 도구를 의미, 목탁도 불구에 해당함)라고 했다. 이 불구로서 윤장대는 이전 글과 불경을 전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서 불교의 경전 등을 윤장대의 내부 보관함에 넣어두고 스님의 주관에 따라서 윤장대 외부에 설치돼 있는 손잡이를 잡고 본인이 기복 하고자 하는 사항을 기도하면서 한바퀴 돌리고 나면 스님들이 수행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기도와 같은 효과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아, 글을 모르거나 불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기복의 불교'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마나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의 대상이었을까? 시대적으로 궁휼하고 어려움이 있는 백성들은 이 예천 용문사에 얼마나 기대어 있었을까? 그리고 이 사찰과 스님들의 역할은 얼마나 소중했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현재와 같이 있는 집 그리고 힘 있는 귀족들에 의해서 일부 특혜가 이루어지기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 있는 사람들은 뭔가 쉽게 윤장대를 접할 수 있었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사찰의 주지스님과 스님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느냐에 따라서 이 윤장대가 특정계층만을 위한 불교가 되었는지, 아니면 정말 글도 모르는 어려운 백성들을 위한 구제로서의 불교의 역할을 했을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참! 이 윤장대와 같은 것은 거의 없지만 티벳의 사원에 가면 벽면에 기도를 하면서 손으로 간단하게 돌릴 수 있는 주판같이 생긴 불구가 있다고 한다. 아마 당시의 티벳 불교가 우리나라로 전파되어 왔다면 그러한 영향에서 착안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되기도 했다.


"오후 사찰을 돌면서 마주한 여러 장독대들이 정겹다."


오후쯤 사찰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모습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다 사찰의 한 편에 나란히 줄을 맞혀 놓인 장독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장독대로 다가가 그 안에 무엇들이 들어있나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장독대, 얼마만에 마주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강화도에서의 생활을 할 때에는 우리 집에도 어머니가 장을 담그시는 몇 개의 장독대들이 있었는데 한 20여 년 동안은 줄지은 장독대를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장독대를 바라보면 그냥 현재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일상과 삶의 냄새가 난다.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우리네 단면이 장독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줄지은 장독대를 마주한 일. 예천 용문사로 훌쩍 떠나오고서 사람을 마주하기 보다는 산중의 삶을 마주한 것 같아서 무엇인가 모를 친근한 된장냄새가 포근함과 함께 밀려오는 것 같아서 좋았다.


예천 용문사의 한 켠에 위치한 장독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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