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프러포즈
믿을 수 없는 남자와의 연애, 그리고 무너져 버린 결혼생활
그는 공대생 출신의 IT기업 팀장이었다. 내가 작은 출판사에서 소위 기싸움이라든지, 에디터 일에 치여 살고 있을 때 그는 판교의 테크노밸리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는 4일제 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받는 봉급은 나의 1.5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봉급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수직적인 조직에서 벗어나 양복을 입지 않고 출근하는, 애플식 경영을 하는 회사였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회의하고 아이디어를 만드는 자유로운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의 팀장이라는 자리는 그에게 엄청난 자신감이자, 무기였다.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자신감의 원천에 대해서 꽤 긴 시간을 피력했다. 그동안 내 옷소매를 붙잡고 지질하게 한 번 더 만나 달라고 굴던 전 남자 친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옷에서도, 손짓에서도, 그가 뿌리는 향수에서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의사결정 능력이 빠른 편이었다. 그는 나의 경청하는 모습이라든지, 다소곳한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얘기를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승낙했고, 그의 차를 타고 그가 잘 안다고 한 오뎅 바에서 술을 마셨다.
오뎅 바에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문교양지식이라든가, TV 예능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그의 신난 표정을 바라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업되었기에 그의 말을 계속 경청하면서 가끔씩 리액션을 해주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의 연애를 시작한 그때, 호감이 있던 그때, 그를 유심히 파악했어야 했다.
그의 이상한 면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를 만난 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내가 퇴근할 때마다 나를 데리러 왔던 그는 그날도 출판사 앞 도로에 차를 대놓은 상태였다. 나는 출판사 창 너머로 그의 차를 발견하고 퇴근하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나는 건물 입구로 나갔다. 그런데 그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그의 차가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그는 계속해서 나와의 약속을 어기기 시작했다. 저녁 약속도, 술 약속도, 심지어 내 생일 때조차도 늦었다. 내 생일에는 반드시 기쁘게 해 주겠노라고 나에게 기대하고 있으라고 했던 그였다. 그날은 일찍 일을 마쳐 회사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꽤 심하게 부딪혀 아파하면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날 바라보면서 히죽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20대 정도 되어 보였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형. 어떤 여자랑 부딪혔지 뭐야. 형, 언제 와. 빨리 와."
어깨를 쳐놓고도 사과 한 마디 없던 그 남자가 갑자기 몸을 배배 꼬면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와 같이 있다가는 이상한 꼴을 더 볼까 해서 건문 입구로 나왔다. 그런데 남자 친구의 차가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차 번호도 1868... 분명히 그의 차였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로 내려갔다. 주위를 보니, 아까 어깨를 부딪혔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포마드 머리에 연예인처럼 화장을 했는데, 옷도 연예인들이 입을 정도로 화려한 복장이었다.
지하 1층에서 그 남자와 나는 동시에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내 남자 친구인 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옆의 젊은 남자가 남자 친구를 안았다.
"형, 왜 이제 와요?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남자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빠르게 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 역시도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 친구와 나 사이에 있는 젊은 남자만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연아."
찰나의 순간이었던가. 아니면 긴 침묵의 시간이었던가. 남자 친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실망이야..."
그 말과 함께 나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계단이 있는 비상구 문을 열었다. 마치 정말 비상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처럼. 나는 비상구 계단을 반층 정도 오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처음이야. 남자 친구에게 남자가 있을 줄이야. 어쩌면 내게 이럴 수 있을까. 그동안 내가 일하는 같은 건물에서 그 남자와 뭘 하고 있던 걸까. 간도 큰 새끼. 어떻게 코 앞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눈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칠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나는 느끼고 있던 것일까. 온몸이 마비된 듯 그 자리에 못 박혀 일어날 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남자 친구는 매일 내게 전화와 문자메시지, 심지어 출판사와 자취방까지 찾아왔다. 그의 전체적인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속여서 미안하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다. 관계 정리했다. 우리 다시 잘 지내보자. 그런 말들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를 떠나 그는 과연 내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까 먼저 생각해봤다. 그는 아마 자기 정체성이 드러난 것에 놀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심정보다는 자신의 위기가 먼저인 것은 아닐까.
하루는 그가 술을 먹고 집 앞으로 찾아왔다.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을까 봐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봤다. 소연아, 정말 미안해. 너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야. 나 한 번만 믿어줘. 그가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고개를 떨구는 그를 바라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자신감 넘치던 모습이 그리웠다. 나도 2년 동안 이 남자를 만나면서 이 사람에게 빠져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했던 데이트, 여행들이 생각났다.
오뎅 바에서 얘기를 나누다 우리는 거나하게 취했고 서로를 바라보다 입을 맞추었다. 그때 그의 붉은 뺨이 한껏 올라가며 그가 나를 향해 웃고 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근처 호텔로 이끌었고 그날 나는 그의 몸을 내 품에 안았다. 관계 후 그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고, 우리는 깍지를 낀 채 잠에 들었다. 그는 오늘부터 1일이라며 자신의 휴대폰에 나와의 기념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런 애정을 한가득 품어주었던 그가 어째서...
크리스마스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초겨울의 하루였다. 마감기한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나는 출판사 매거진에 3쪽짜리 에세이를 써야 해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나에게 맡겨진 막중한 임무이기도 했고, 헤어진 남자 친구와 재회하기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했다.
글을 써나가면서 자꾸만 남자 친구에 대한 생각이 봇물 터진 것처럼 밀려들어왔다. 몇 시간이 지나도 글에는 진척이 없었고, 그에 대한 생각도 깊어져 갔다.
그때, 휴대폰 액정에 그의 이름이 뜨면서 휴대폰 기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소연아, 나야. 지금 밖으로 나와볼래?"
"나 지금 바빠. 그러니까..."
"잠깐만, 잠깐만 나와봐."
나는 외투를 입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눈이 내리는 와중에 그가 꽃을 든 채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그는 내게 다가와 꽃을 건네주고 자신과 결혼해달라 했다. 그는 내 눈앞에 다이아 반지가 든 반지 케이스를 열어 보여줬다.
"소연아, 내가 널 실망시켜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 네 마음 아플 일 없게 할게. 날 한 번만 믿어줘. 나와 결혼해주지 않을래?"
나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와 바람이 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음속의 의문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갑작스러운 로맨스는 웬 말인가. 이 남자, 제정신인가.
건물 주변에서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조용한 카페에 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제정신이니?"
"아니. 난 제정신이야. 이제야 난 깨달았어. 나한테는 소연이 너뿐이란 걸. 너 없이는 난 살 수가 없어. 나와 결혼해줘."
"아니, 남자... 랑 그런 관계를 가진 걸 알아버렸는데도 이러는 이유가 뭐야? 위장하는 거야?"
"걔는 잠깐 만난 거였어. 걔가 일방적으로 나를 쫓아다닌 거고. 걔하고는 정말 끝났어. 그리고 네가 의심할 만한 건 하지도 않았다고."
자신의 변명을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이 사람에게 더는 신뢰가 가지 않아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가 무릎을 꿇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제발 날 버리지 마, 소연아."
마지막의 그 마지막에 나는 결국 그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고,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성실했고, 곧 태어난 아이에게도 다정했다. 그는 이제 그때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 같았다. 일과 가정에 충실했다.
나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출판사에 육아휴직을 내고 집에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가끔씩 회식자리가 있어 술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왔는데, 하루는 남편의 코트에서 맡아본 적 없는 향수 냄새가 나길래 코트를 세탁하려고 주머니를 뒤진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듯이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명함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에는 게이 선수 바, 대가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오른손 약지에 낀 다이아 반지를 뺐다 꼈다 반복했다. 이 결혼 생활,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제 그와의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참히 깨져버린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