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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와 같이 쓰려고 들여놓은 침대였다.
언젠가 에밀리가 독감을 심하게 앓을 때 에밀리를 간호하면서
“결혼은 못하더라도 동거하는 건 괜찮지 않겠냐?”는 설득에 어렵사리 성공한 이사칠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곧바로 살림살이를 사들였다.
제일 중요한 살림살이는 단연코 킹사이즈 침대였다.
이사칠은 그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에밀리를 꼭 껴안고 단잠을 자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운을 찾은 에밀리가 동거 문제를 고민해볼 시간을 조금 더 달라는 바람에
이사칠은 무궁무진한 사랑을 피워갈 곳으로 여긴 침대를 구석방에 넣어둬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엄청나게 나빴던 여배우가 촬영 중에 촬영용 침대에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작품 설정 상 침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촬영을 우선시하는 이사칠은 구석방에 넣어둔 침대를 떠올렸지만
에밀리를 위해 사들인 침대를 촬영에 투입하는 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촬영은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한다는 다급함을 이기지 못한 이사칠은
결국 촬영용 주택에서 멀지 않은 자택에서 침대를 옮겨와 소품으로 투입하면서
작품에 한국적인 분위기를 담아낸다는 원칙에 따라
오방색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문양의 시트를 씌워 10여 편의 작품에 활용했다.
국세청은 개인이 사용할 용도로 구입한 침대의 구입비용을 제작비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며
세금과 벌과금을 부과했다.
이사칠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쟁을 벌이게 됐는데,
국세청이 침대가 촬영에 사용됐다는 걸 뒤늦게 인정하면서 분쟁이 마무리된 거였다.
이사칠은 에밀리와 사랑을 키워갈 곳으로 쓰려고 구입했지만
엉뚱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거짓된 사랑을 나누게 해주는 용도로 사용하고
세무당국을 상대로 한 분쟁에까지 휘말리게 만든 침대는 지구에 남겨두고 왔지만,
에밀리와 오붓하게 식사할 때 사용할 식기(食器)는 우주에 챙겨왔다.
우주왕복선에 실을 수 있는 개인용 화물의 무게와 부피에 가해진 제약 때문에
많은 짐을 포기해야 하는 와중에도 은수저 네 벌은 악착같이 가져온 것이다.
몇 년 전 에밀리에게 생일 선물로 줄 목걸이를 사려고 들른
한국인이 운영하는 금은방에서 구입한 거였다.
어른용 수저 두 벌과 어른용보다 작은 아이용 수저 두 벌.
장수를 바라고 복을 비는 의미의 수(壽)와 복(福)이 새겨진 식기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부모님과 앉았던 밥상이었다.
이사칠은 나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수저보다 무겁고 싸늘한 느낌을 풍기는 은수저를 어루만지면서
옛날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국과 정성스레 장만된 반찬들이 놓인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환히 웃던 시절을 떠올렸다.
까마득한 과거지사 같은 그 단란한 식사를 에밀리와 재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원래는 어른용 두 벌만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금은방 주인이 장차 태어날 아이들 것도 미리 장만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권했다.
뻔한 상술이었지만, 그럴듯한 얘기이기도 했다.
자신과 에밀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둘 다 딸이거나 둘 다 아들이거나 1남 1녀인 아이 둘이 둘러앉은 식탁을 상상하니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이사칠은 은수저를 남몰래 소중히 간직했지만,
지상에서 에밀리와 가정을 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은수저를 꺼낼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걸 지상에 두고 오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이사칠은 화성에서는 반드시 쓸 작정으로,
되도록 아이들 것도 쓰고야 말겠다는 심산으로 식기들을 챙겼다.
그런데 이 식기들은 화성에서는 몰라도
카르만 라인을 벗어난 이후로 화성까지 가는 도중에 쓸 일은 없을 터였다.
당장 지금 여는 축하파티에도 이 식기들은 등장할 일이 없었다.
〈너바나〉 1편의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로 네 사람이 모인 자리였는데,
지상에서처럼 갖가지 먹을거리와 음료가 푸짐하게 차려지고
많은 손님이 들락거리는 성대한 잔치는 아니었다.
우주정거장에 있는 제작진 네 명이 모여 치르는 조촐한 잔치였다.
주위에 떠있는 것도 솜씨 좋은 요리사가 조리한 맛있는 음식이나 샴페인 같은 게 아니라,
식품을 건조시킨 다음에 밀봉 포장한 우주식품이었다.
우주식품으로는
지상에서 조리한 후 깡통이나 파우치에 넣어 밀봉해 우주정거장으로 보급한 것이 있었고
조리한 후 건조시킨 다음에 튜브에 담은 것들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신난 어린애처럼 우주식품 튜브를 한가득 안고 기계로 날아가
튜브를 하나씩 기계에 꽂고는 건조된 음식 분말에 수분을 투입했다.
튜브에 담긴 식품들은 수분이 투입되는 즉시 지상에서 조리를 마친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레이스는 원래 모양을 되찾은 식품이 담긴 튜브를 선실 가운데에 있는 세 사람에게로 툭툭 밀었다.
둥글게 모인 세 사람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튜브들을 잡아 가운데에 놓고 그레이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말이 “식사”일뿐,
더 적절한 표현은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다.
이사칠이 생각하는 “식사”에는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기 전부터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음식 냄새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맛을 느끼는 데에도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는 음식 냄새를 맡기가 어려웠다.
튜브에 담긴 우주식품은 물을 주입하고 데워도 냄새를 풍기지 않았고,
냄새가 나더라도 우주정거장에 밴 불쾌한 냄새에 금방 덮이는 데다
환기시스템 때문에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버렸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도,
홍어처럼 발효시킨 식품 특유의 톡 쏘는 냄새도,
꿀이나 시럽의 달착지근한 냄새도 맡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어느 순간 냄새조차 맡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황량한 남극대륙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감각을 상실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연구 결과는
고독한 공간인 우주정거장에도 당연히 적용될 것이다.
우주인들이 우주정거장에 밴 지독한 악취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태연하게 생활하는 건
후각을 상실한 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