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
교단의 높은 분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인 “꼴통 신부” 김범신 베드로 신부(김윤석)는
자신을 따르던 소녀 영신(박소담)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악령을 퇴치하는 작업을 도울 보조 사제가 필요하다.
최준호 아가타 부제(강동원)를 보조 사제로 임명한 학장 신부(김의성)는
구마행위를 보좌하라는 임무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호기심도 느끼면서 길을 나선 아가타 신부를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면서
교황의 취임사 마지막 구절에
“인간의 빛나는 이성과 지성으로”라는 구절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고는
구마행위를 녹화해 가져오라며 비디오카메라를 내민다.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영화 <검은 사제들>을 보다 보면
“보지 않았음에도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떠오른다.
베드로 신부와 아가타 부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에 나선 전사들이지만,
한국 천주교 교단에게, 나아가 교황청에게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쩌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제들일뿐이다.
구마행위를 비공식적으로 허가한 높은 분들은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며 아가타 신부에게 앞서 얘기한 비밀 임무를 하달하기까지 한다.
<검은 사제들>은
이 세상에 날뛰는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여부에 대한 믿음과 불신을 다룬 영화다.
동시에 교단과 속세 양쪽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악령을 처치하려는 외로운 투쟁에 나선 구마신부들의 희생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검은 사제들>은 구마행위를 실감 나게 묘사해서 관객을 오싹하게 만들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영화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설정들이 있다.
구마행위를 녹화하는 건 안 되는데 소리를 녹음하는 것은 괜찮은 이유는 뭘까?
높은 분들이 녹음된 악령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서 아가타 부제가 구마행위를 몰래 녹화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영상의 설득력은 소리의 그것보다 100배 이상 크다는 입장인 걸까?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생활의 세계에 침투한 귀신(악령)이 자행하는 온갖 악행과
그것들을 쫓아내고 평온한 삶을 살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다룬 오컬트 장르는
기독교문화권인 서양에서는 틈틈이 만들어지면서
<엑소시스트>와 <악마의 씨>, <오멘> 같은 흥행작들을 내놓은 장르지만,
한국영화계에서는 제대로 만들기도 힘들고 흥행하기도 어려운 장르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로 이 장르를 개척하고는
소재를 서양의 기독교로부터 한국의 무속과 풍수지리 쪽으로 옮기면서
꽤 재미있는 <사바하>와 엄청난 히트를 친 <파묘>로
한국 영화계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검은 사제들>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검은 수녀들>이 다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그 장르의 영역을 한껏 넓혀놓은 감독이 됐다.
장재현 감독이 만든 장편영화 세 편의 독특한 점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과 철학을 자유로이 넘나 든다는 것이다.
김범신 신부가 영신을 구해낼 최후의 구마행위를 행하기로 정한 날은
불교에서 음기(陰氣)가 가장 성한 날로 여기는 우란분재다.
최준호 부제가 그를 보좌할 사제로 선택된 이유 중 하나는 호랑이띠이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김범신 신부도 솜씨 좋다고 인정한 제천법사가
영신을 구해내려는 굿을 벌이다가 실패하고 철수한 후에야
최후의 구마행위에 착수한다.
장재현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동양과 서양이 바라보는 악마(악령)의 존재는 사실상 동일하다.
그 존재들을 명명하는 방식과 몰아내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장재현 감독은 동서양의 세계관이 어우러진 세계를 창조해 내는 솜씨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 세계를 강렬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구현해 내는 연출력도 빼어나다.
구마의식 중에 바퀴벌레와 파리, 쥐가 몰려드는 모습은 섬뜩하고 소름이 돋는다.
소의 머리를 등에 진 무당이 등장하는 제천법사의 굿 장면은 기괴하고 오싹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 영화가 신부 캐릭터들을 묘사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개신교 목사와 달리,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 불교의 비구와 비구니는
독신으로 살면서 세상에 후손이라는 인연을 남기지 않는다는 계율을 지켜야 하는 종교인들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천주교 사제와 불교 승려들을 떠올릴 때는
왠지 모르게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상하고는 한다.
그런데 <검은 사제들>은 신부들을 (심지어 신부가 되려는 대학생들까지)
술을 좋아하고 서로를 향해 약간 속된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는 사람들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로 묘사한다.
으슥한 곳에서 시위에 쓸 물건들을 준비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하는 그들은
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는 대리인이라기보다는
사제복을 걸친 일반인 같은 사람들이다.
<검은 사제들>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맹견에게 물리는 동생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악령에게 공략당해
영신의 침실에서 도망쳐 나온 아가타 부제가
다시 구마 현장으로 돌아가기까지 과정을 담은 장면이다.
쥐와 바퀴벌레가 떼거지로 튀어나오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건물인 영신의 집 앞에는
머리 위에 전선들이 엉켜있고 까마귀들이 음산한 소리로 울어대는 어둡고 좁은 골목이 있다.
그런데 그 골목을 벗어나기만 하면 휘황찬란한 조명이 켜진 가게들이 모여 있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가 나온다.
장재현 감독은 눈부신 화려함과 어두침침한 누추함,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공간 설정을 통해
구마사제들과 악령이 필사적으로 맞붙어 처절하게 싸우는 공간은
그런 싸움이 벌어진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풍요와 안락을 누리는 세계와 이웃하고 있는 곳이라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관객에게 전한다.
이 장면은 아가타 부제가
그를 구속하고 있던 과거를 극복하고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는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의 성장을 상징하는 물건은 “신발”이다.
동생이 개에게 물릴 때 운동화 한 짝을 버려두고 도망쳤던 아가타 부제는
악령이 두려워 뛰쳐나온 골목길 밖에서 자신이 양말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양발에 다 신발을 신는 정상적이고 떳떳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는 영신의 침실로 돌아간다.
악령은 실제로 존재할까?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의 빛나는 이성과 지성”으로는 파악도 이해도 되지 않는 세계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한 얘기를 목청껏 외쳐봐야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공자님처럼
그런 얘기는 되도록 피하려 애쓴다.
그런 세계는 <검은 사제들> 같은 영화를 통해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지 않았음에도 믿는 자들은 복”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