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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화성인 247>

★ 63 ★

by 윤철희

이사칠은 에밀리의 진심어린 프레젠테이션 덕에

NDM이 “스폰서 계약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극비에 붙인다”는 조건으로 스폰서를 맡고

프로젝트를 상대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누구보다도 기뻐했지만,

막상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는 혼자 있는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대성통곡을 했다.

화성행이 확정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된 서글픈 현실 때문이었다.


“이제는 네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줄게.

네가 나를 만들어낸 건 결국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서잖아? 그렇지?”

에밀리가 머릿속으로 화성행이 확정되기까지 과정을 되짚고 나자 앨리스가 다독이는 투로 말했다.

“그 사람이랑 같이 화성에 가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야.

네가 그 사람이랑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가능성은 눈곱만치도 없으니까.

너랑 그 사람이랑 사귄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지하게 씹어댔을 거야.

형부랑 처제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고.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참 이상해?

왜 그런 관계를 좋아하는 걸까?

그 작자들이 그런 걸 좋아하니까 나도 형부랑 놀아나는 처제 역할을 대여섯 번은 연기한 거잖아.”


앨리스는 에밀리를 꼭 껴안았고,

에밀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앨리스의 온기를 느꼈다.

앨리스는 동생을 재우는 다정한 언니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그만 자. 힘든 시간 보냈으니까 단잠을 자도록 해.

그 사람이랑 화성에서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고.

꿀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나날을 살아가는 거야.”


에밀리는 “그래, 언니, 고마워”라고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손님들의 방문은 갖가지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이사칠과 에밀리에게 적잖이 위로가 됐다.

지구에서 훈련을 받다 “세 번째 사람”에 대한 강의를 듣고는

우주에서 손님들의 방문을 받으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알리자는 약속을 일찌감치 해둔 두 사람은

인생 최초로 같은 잠자리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들을 찾아온 손님들과 나눈 얘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엄밀히 따지면 입 밖으로는 한 마디 말도 내뱉지 않고서도 다정하게 주고받은 대화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그레이스와 버지니아에게는 자신들에게 “세 번째 사람”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두 사람은 괜한 걱정을 할 게 분명했다.

이사칠과 그레이스는 “세 번째 사람”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푼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어서는 급할 때 유용하게 써먹는 저금처럼,

과거에 맺은 인연들이 고독하고 답답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방책이라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은 앞으로도 자신들을 찾아올 그들과 잘 어울려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마침내 인생 처음으로 서로를 껴안고 같은 침낭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주체 못할 성욕을 해소하고 나서야 잠들 수 있는 그레이스와 버지니아조차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얌전히 잠든 밤에,

두 사람은 상대를 껴안은 팔에 잔뜩 힘을 줬다.

팔에 힘을 빼기라도 하면 상대방이 어디론가 둥실둥실 떠내려갈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처럼.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온전히 처음으로 동침하게 된 두 사람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질을 할 사람도,

두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키득거리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속닥거릴 사람도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순간,

온갖 장비들이 웅웅거리고 선체에 찌든 요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선실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아늑한 공간으로,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두 사람은 외로움과 갑갑함을 이겨내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껴안고 잠을 자기로 약속하고는

서로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고 흐뭇해하며 지구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단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함께 행복을 일궈나가는 달콤한 꿈을 꾸기를 바랐다.


대기권 안에서 맺어지는 데 실패한 사랑은,

해처럼 이글거리고 달처럼 은은하고 별처럼 반짝거리고 어둠처럼 깊고

블랙홀처럼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사랑은

우주로 나와 달 근처에서 새롭게 시작돼서는 온 우주를 화사한 빛으로 물들일 터였다.


느린 숨을 쉬듯 나풀거리는 짙은 색 커튼은

바깥세상이 두 사람의 사랑의 둥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아줬다.

그 덕에 몸을 쓰는 일로 생계를 꾸리다 몸이 망가져버린 남자와

태어날 때부터 망가질 공산이 무척이나 큰 몸을 타고난 여자는

처음 만난 이후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황량한 우주의 자그마한 선실에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온갖 눈부신 빛들로 채워진 광활한 은하계의 변두리에서

비로소 두 사람만의 사랑을 꽃피웠다.


훗날 떠올릴 기억 속에서 낭만을 무한대로 증폭시켜줄 붉은 노을도

어깨에 수북하게 쌓인 눈송이도 바랄 수 없는 공간인 우주정거장에서 나누는 사랑이었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체내에서 나오면서 온도를 살짝 잃고 체온보다 차가워진 소금기 담긴 액체 몇 방울이

선실 안에 켜진 은은한 비상등을 받아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며 선실 벽으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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