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
리뷰를 읽은 이사칠의 눈에서 눈물 두어 방울이 떨어져 나왔다.
리뷰의 대부분을 차지한 쓴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평론가가 특별히 그를 위해 적은 그 문장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써준 별다를 것 없는 의례적인 문장일 수도 있었지만
이사칠에게는 천군만마만큼이나 큰 힘이 되는 글귀였다.
이사칠은 리뷰를 다시 읽었다.
암기라도 하려는 듯 문장 하나하나를 숙독하며 꼼꼼히 음미하는 데에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감동을 다시 느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포르노는 주류 예술의 영향력에 편승”한다는 부분을 읽을 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스윙바이(Swing-by). 플라이바이(Fly-by)로도 불리는 단어.
스윙바이는
우주선이 적은 동력으로 먼 거리를 항행하기 위해 다른 천체의 중력을 이용하여 속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1974년에 발사된 NASA의 매리너(Mariner) 9호가 최초의 행성 스윙바이를 한 이후로
대부분의 장거리 우주탐사선이 이 기술을 이용해 추가적인 속도를 얻었다.
스윙바이의 장점은
연료 소모 없이 천체의 중력을 이용해 우주선을 가속하기 때문에 연료가 절약되고
그 연료가 차지했을 공간에 다른 장비를 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스윙바이에도 단점은 있다.
중력을 제공하는 행성의 위치와 궤도라는 변수의 영향을 크게 받는 방법이라서
스윙바이를 활용할 수 있는 시기에는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성의 경우에는 스윙바이를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칠 경우
다음 스윙바이를 하려면 1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이사칠과 에밀리를 싣고 화성으로 갈 우주선도 이 방법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이
여러 행성이 벌이는 줄다리기에 투입되는 중력을 변수로 삼은 방정식을 놓고
복잡한 계산을 한 끝에 결정한 화성으로 가는 최적 경로는 곧바로 화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출발한 우주선은
우선은 금성을 향해 가서는 금성의 중력을 이용해 가속한 후 화성으로 향할 것이다.
그런데 스윙바이를 하면 연료는 절감되겠지만 더 긴 비행시간이라는 대가도 치러야 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하는 이치처럼, 연료와 시간을 맞바꿔야 하는 셈이다.
이사칠이 정혁준의 리뷰를 읽으며 “스윙바이”를 떠올린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중력이나 영향력을 이용하는 것은
우주여행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혁준이 〈악마〉 시리즈를 언급하며 지적한 것처럼
이사칠 자신이 히트한 주류 문화의 영향력을 이용해 스윙바이를 했고,
많은 포르노 작품이 기회만 생기면 그런 방식을 구사한다.
아니, 따지고 보면 포르노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살이 자체가 스윙바이를 뻔질나게 이용한다고 이사칠은 생각했다.
우주는 삼라만상이 각자의 중력을 행사하며 벌이는 무수히 많은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경기장이다.
우주에는 무한히 많은 존재들이 행사하는 중력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없이 많은 힘이 난마처럼 얽히고설켜있다.
별은 우주의 먼지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에서부터 탄생한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것처럼 자잘한 우주 먼지들이 모여 별을 이룬다.
그렇게 만물이 행사하는 중력이 인드라망(Indra網)처럼 엉켜있는 우주에서는
누구나, 무엇이나 스윙바이를 한다.
그중의 어떤 별은 무지하게 커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끌어당기고
심할 경우 너무 가까이 다가온 별들을 붕괴시키기까지 한다.
아주 작은 미물들도 나름의 중력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당기려 애쓰지만
그 보잘것없는 힘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끌어당기지 못하고
더 큰 중력을 행사하는 존재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된다.
세상 만물이 각자의 중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인간도 중력을 뿜어낸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풍기는 카리스마와 영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사람은 별이다.
중력을 내뿜으며 다른 행성들과 끝없는 줄다리기를 벌이는 별이다.
어떤 별은 강한 중력으로 다른 별들을 끌어당기고
어떤 별은 중력이 미약한 탓에 다른 별들의 중력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중력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끌려가고
어떤 사람의 중력은 한사코 사례를 치며 멀어진다.
“인간”이라는 별의 궤도는, 우리 인생의 행로는 수없이 많은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
포르노업계와 업계 종사자들은 중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한 존재라서
주류 문화의 추앙 받는 거장들과 성공한 작품들을 이용할 기회가 생기면
잽싸게 그 기회를 움켜쥐어서는 더 멀리까지, 더 효율적으로 나아가려 애쓴다.
〈악마〉 시리즈도 〈네이키드 나이트〉 시리즈도 다 그런 작품들이었다.
이사칠은 다른 존재의 중력을 이용해먹는 스윙바이를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중력을 추진력으로 삼아 나아가니까.
당장 이사칠 자신이 더블엑스 걸의, 찰리 윤의, 앨리스 원더의, 에밀리 박의,
그레이스 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중력을 이용한 스윙바이를 통해
여기 루나 게이트웨이까지 올 수 있었다.
설령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하고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하게 큰 중력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다른 더 큰 존재들이 행사하는 중력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텐데,
중력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아 끝없이 세워진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문광호 목사를 비롯한 믿음이 깊은 이들을 이끄는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물론, 그분이 실제로 계실 때 얘기겠지만.
숱하게 많은 이들의 중력을 빌려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사람인 이사칠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스윙바이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스윙바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스윙바이를 제대로 하기 위한 계산을 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과
계산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계산을 잘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존재의 중력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중력에 휘둘리는 바람에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리로 저리로 끌려 다니면서 갈팡질팡한다.
그래도 이사칠은 그렇게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고 자신의 궤도를 어떻게든 안정되게 유지하려고 악착같이 애썼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정혁준의 리뷰를 곱씹으며 바라본 루나 게이트웨이의 현창 너머로
그와 에밀리를 화성으로 데려갈 우주선 MS 5호가 보였다.
금성의 중력을 추진력으로 삼으려고 목적지인 화성으로 직행하지 않을 우주선이 보였다.
이사칠은 인생을 곰곰 반추해봤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중력을 가진 자신은 스윙바이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인정하고는 생각해봤다.
나는 내 미약한 중력을 다른 사람들의 이로움을 위해 얼마나 행사했을까?
나는 과연 내게 주어진 중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사할 줄 아는 인간이었을까?
그가 응시하는 우주선이
스윙바이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로 그를 데려갈 채비를 하는 동안,
그는 쉽게 해답에 도달하지 못할 고민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