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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l 18. 2024

<엑스맨>이 <터미네이터>를 만났을 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저지른 짓을 감안하면

앞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영화가

만들어질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적인 행실이야 어쨌든

그는 재능 있는 감독이었다.

그가 만든 작품들 중에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반전(反轉) 영화도 있고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흥행작도 있지만,

나는 그가 영화계에 남긴 제일 큰 업적은

<엑스맨> 시리즈의 실사화를 성공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스핀오프까지 포함해

열 편 넘는 영화가 만들어진

<엑스맨> 시리즈의 퀄리티는

영화마다 들쭉날쭉하지만

싱어가 연출한 작품 네 편은

꽤나 좋은 영화들이었다.

나는 혹평이 많은 <엑스맨: 아포칼립스>도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아무튼,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싱어의 제일 훌륭한 <엑스맨> 연출작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하 <데이즈>)다.



<엑스맨> 시리즈는

코믹스 원작의 태생부터 꽤나 정치적인 작품이었다.

돌연변이들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인간들에 대응하는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노선 차이는

코믹스 원작이 탄생한 1960년대에 흑인운동을 이끈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X)의 노선 차이를 그대로 반영한 거였다.


코믹스 원작의 정치적 성향을 스스럼없이 이어받은

<엑스맨> 실사화 시리즈에 속한,

싱어의 시리즈 복귀작인 <데이즈>도

케네디 암살과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삼고

닉슨인 게 분명한 음울한 인상의 대통령을

등장시키는 식으로 정치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2014년에 개봉한 <데이즈>를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국제 정세라는 게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 영화가 개봉된 10년 전만 하더라도

서방세계 입장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국가이긴 해도

적대적인 국가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중국과 미국이 첨예하게 맞서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금의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전멸 위기에 몰린 돌연변이들이 몸을 피하는 최후의 피난처를

러시아와 중국으로 선택한 <데이즈>의 설정은

묘한 아이러니로 보인다.


<데이즈>는 그 시기에 블록버스터들을 망쳐놓기 일쑤였던

중국 영화시장을 향한 할리우드의 욕망을

솜씨 좋게 처리한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 자금의 투자와 중국 박스오피스의 흥행을 노린

할리우드가 중국 배우를 위한 역할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뜬금없이 중국을 배경으로 삼는 등의

지나치게 티 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망쳐놓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데이즈>는 판빙빙(范冰冰)에게

영화에 잘 녹아드는 캐릭터를 제공하고

중국과 관련된 튀는 설정은 거의 하지 않는 수완을 발휘했다.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개발돼

돌연변이들의 초능력을 순식간에 모방할 수 있는

천하무적 센티널 때문에 막판에 몰린 돌연변이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울버린(휴 잭맨)의 영혼을

센티널이 개발되기 직전의 과거로 보내

역사를 바꾸려 든다는 <데이즈>의 내용은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도저히 물리칠 길이 없어 보이는

센티널의 무시무시한 위력도 무지막지한 악당인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 만든다.



<데이즈>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울버린의 상대가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가 아니라

상충하는 신념을 가진 동료 돌연변이들과

그들을 없애려는 인간들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찰스(제임스 매커보이)와

미래의 찰스(패트릭 스튜어트)가 대면하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같은 장면도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데이즈>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누구나 퀵실버(에반 피터스)가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를 탈출시키는

“타임 인 어 바틀(Time in a Bottle)” 장면을 꼽을 것이다.

장면에 어울리는 노래가사,

첨단 특수효과가 안겨주는 시각적 쾌감,

퀵실버의 유쾌한 장난기가 빚어내는 유머가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이 장면이

<데이즈>를 대표하는 장면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데이즈>에는 내가 이 장면 못지않게,

아니, 이 장면보다 더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매그니토가 거대한 스타디움을 들어 올린 후

백악관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매그니토는 굉장히 매력적인 빌런이다.

그의 굴곡 많은 개인사를 감안하면

그가 인간들을 향해,

그리고 인간에게 우호적인 돌연변이들을 향해

과격한 노선을 택하는 것도 그럴법한 일로 수긍이 된다.

그런데 내가 매그니토에게 느끼는 매력은

대체로 금속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그의 초능력에서 비롯된다.


매그니토의 초능력은

영화적으로 표현해 관객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시각적 쾌감 면에서는

그 어떤 슈퍼히어로나 빌런도 겨루기 힘든

최상급 초능력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영화에 들어있건

매그니토가 초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항상 뇌리에 깊게 새겨지곤 했다.

<엑스맨 2>에서 유리감옥에 갇힌 매그니토가

경비원의 체내에 흐르는 혈액에서 철분을 뽑아낸 뒤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탈출하는 장면은 정말로 근사하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세바스찬 쇼의 머릿속으로 동전을 천천히 이동시키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섬뜩하다.

<데이즈>에서 달리는 기차를 따라간 후

열차 뒤에 놓인 철로를 엿가락처럼 갖고 노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데이즈>의 스타디움 장면은

매그니토가 발휘하는 초능력의 압도적인 수준을 보여준다.

이전 영화들에서도 매그니토의 초능력에 항상 매료됐었지만,

그의 초능력이 거대한 스타디움을 땅에서 뽑아낸 다음에

그걸 들고 이동해 백악관 주위에 내려놓는

수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래서 노년의 매그니토(이안 맥켈런)가

프로페서 X 일행을 지키려고 센티널과 맞서다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모습을 보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슬퍼지면서 그를 딱하게 여기게 됐다.

그 가공할 위력을 가진 매그니토도 센티널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니.


돌연변이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아슬아슬하게 과거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엑스맨> 실사화 시리즈의 첫 영화였던 <엑스맨>의 설정이 실현된다.


<데이즈>를 보고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키티 프라이드(엘리엇 페이지)가

울버린의 영혼을 과거로 보내듯

브라이언 싱어의 영혼을

그가 과오를 저질렀던 시점으로 돌려보낸다면

싱어는 이번에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착실하게 살면서 지금보다 더 훌륭한 경력을 쌓았을까?

이 질문에

“아니, 그는 그래도 똑같은 짓을 저지를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은

“운명의 힘은 누구도 바꾸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운명론자일 것이다.

<데이즈>와 <터미네이터>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지만

너무도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운명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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