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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방법을 가리키는 한자들 - 1

구울 적(炙), 익을 숙(熟), 찔 증(蒸)

by 윤철희

인류는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과는 다른 진화 경로를 밟아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다.

인류의 진화에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는 직립 보행과 그 결과로 자유로워진 두 손,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준 (엄지를 비롯한) 손가락,

언어 사용 등 다양한 요인이 꼽히는데,

자연에서 얻은 먹을거리를 그 상태 그대로 생식(生食)하는 동물들과 달리

불을 이용한 조리과정을 거쳐 화식(火食)을 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된다.

불을 써서 음식을 조리하면

음식을 살균하는 효과와 더불어 소화가 더 잘 된다는 등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한자에는 조리방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글자들이 있는데,

이 글자들의 공통점은 “불 화(火)”“연화발(灬)”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연화발”은 “불 화(火)”가 변형된 부수로,

“아래에서 위로 타오르는” 불의 속성을 반영하듯 글자 밑 부분에 들어가

해당 글자에 “불로 가열한다”는 뜻을 부여한다.


학술적인 근거라고는 전혀 찾을 길이 없는 개인적인 상상을 하자면,

인류가 먹은 최초의 화식은 산불이 난 이후에 불에 구워진 고기를 먹은 거였을 것이다.

그렇게 먹은 고기에 맛을 들인 인류는

그다음부터는 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적극적인 조리를 시작했을 것이다.

“고기”를 뜻하는 “육달월(月)”이 옆으로 누워있고 그 아래에 “火”가 놓여있는 글자인 “구울 적(炙)”

“불로 고기를 굽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炙”에는 “고기를 굽는다”는 뜻과 함께

“생선이나 고기를 양념하고 대꼬챙이에 꿰어 불에 굽거나 지진 음식”이라는 뜻도 있다.

명절 때나 차례를 지낼 때 만들어 먹는 음식인 “산적(散炙)”에 “炙”이 들어가는 이유다.


그런데 한자를 만든 이들이 제일 중요한 생각하는 조리방법은

“굽기”가 아니라 “삶기”였던 것 같다.

“굽기”는 불의 세기와 굽는 시간 같은 변수에 따라

최종 결과물의 맛과 영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신경 쓸 부분이 많은 조리방법이겠지만,

냄비에 넣는 물의 양과 첨가하는 재료의 종류와 첨가순서,

양념을 넣는 순서와 양념의 양, 조리시간 등 무척 많은 변수를 감안해야 하는 “삶기”야말로

인류가 조리행위에 제대로 눈을 뜨고 깊은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굽기”보다 차원이 높은 조리방법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셰프”에 해당하는 옛날 단어인 “숙수(熟手)”

“구울 적(炙)”이 아니라 “익을 숙(熟)”이 들어가는 이유일 것이다.


글자 “熟”에는 “삶을 팽(享)”이 들어있다.

“향유(享有)하다” 같은 단어에 들어가면서 “누릴 향(享)”이라고도 읽는 “享”은

“연화발”을 집어넣어 “삶는다”는 뜻을 더욱 강조한 “삶을 팽(烹)”하고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烹”이 들어간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의 사자성어 “토사구팽(兔死狗烹)”일 것이다.

이 사자성어는 요즘에는 “팽(烹) 당했다”는 형태로 많이 쓰인다.


“익을 숙(熟)”은 “享” 옆에 “~을 취(取)하다”는 뜻을 가진 “알 환(丸)”을 배치하고

그 밑에 연화발을 넣어 “삶는다”는 뜻을 더욱 강조한 글자다.

“熟”에는 “익다, 익히다”라는 뜻 말고도 “무르익다,” “숙련(熟練)하다” 등의 뜻도 있다.

생선이나 고기를 잡은 후 알맞은 환경에 일정기간 놓아둬 색다른 맛을 내는 과정을

“숙성(熟成)”이라고 한다.

“~가 성숙(成熟)해졌다”는 등의 표현에도 “熟”이 들어있는 걸 보면,

“熟”은 단순히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만 국한된 글자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단어들에서 “熟”이라는 글자에는

“익힘의 대상, 삶음의 대상”이 되는 재료가 날것 상태에서 덜 익은 상태를 지나 익은 상태에 도달하는

변화를 겪으며 차원이 달라진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음식을 조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증기(蒸氣)”를 이용해 “찌는 것”도 있는데,

“찌는 조리방법”을 가리키는 글자가 “찔 증(蒸)”이다.

“蒸”은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표현한 부분이 “초두머리(艹)”로 변형돼 들어가고,

그 아래에 “이을 승(丞)”과 “연화발”을 배치한 글자다.


“끓는점이 각기 다른 액체들의 혼합물을 끓여서 분리시키는 방법”을 가리키는

“증류(蒸溜)”라는 단어에서 보듯,

“蒸”은 고체 식재료를 조리하는 방법만이 아니라 액체 식재료를 다루는 데에도 사용된다.

요즘의 “소주(燒酒)”는 화학식 희석주이지만,

옛날에 담아 마시던 정통 소주는 발효된 액체를 끓여서는

용기 윗부분에 “이슬(露)”처럼 맺히는 술을 모은 증류주였다.

그래서 “露”에는 “좋은 술”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진로(眞露)”의 뜻이 “참이슬”이라고 말하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상표의 진정한 뜻은 “참으로 좋은 술”이라고 봐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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