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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동화 같은 영화에는 "프레임"이 한가득!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by 윤철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하 <부다페스트>)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여러 모로 튀어 보이는 작품이자

전환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튀어 보인다고 한 건

평단의 호평과 지지를 받았지만

뛰어난 흥행성적을 보인 영화는 없다시피 했던 앤더슨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부다페스트>는 흥행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전환점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한 건

그림책을 보는 듯한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화면과 특유의 구도와 카메라워크로 이뤄진

앤더슨 특유의 비주얼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구현한 작품이면서도

앤더슨이 앞서 내놓은 영화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잔인하고 선정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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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은 <부다페스트>에서

<바틀 로켓>과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열 테넌바움>, <다즐링 주식회사>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는 한편으로

절단된 손가락과 머리, 상반신 노출과 나체 사진 등을 보여준다.

앤더슨은 <스티븐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서는 총격전을 보여줬고

<문라이즈 킹덤>에서는 영화에 정치적 색채를 살짝 가미한 바 있지만,

<부다페스트>에서처럼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고

교도관들을 살해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다가

교도관과 죄수가 서로를 찔러 죽이는 모습을 부감으로 잡아낸 적은 없었다.

아울러 호텔 총격전에서 보듯 총격전의 규모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그리고 이 영화 이후로

앤더슨은 <개들의 섬>과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대놓고 정치적인 내용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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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의 커리어를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한 영화인 <부다페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내러티브와 비주얼 양면에서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구스타브가 물려받는 그림인 “사과를 든 소년”은

많은 등장인물이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맥거핀” 노릇을 수행하는데,

앤더슨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이 그림을 담은 고풍스러운 액자(프레임)와 비슷한 프레임을 활용하는 정도는

“집착”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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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러티브는 시간적 배경 면에서

“프레임 속에 다른 프레임을, 그 속에 또 다른 프레임”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전개되다가

영화가 끝날 때는 그 역순으로 프레임들을 빠져나온다.

공동묘지를 찾는 소녀를 보여주는 현재 시점에서

늙은 시절의 작가(톰 윌킨슨)가 관객을 바라보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찾았던 일을 이야기하는 1985년으로 이동했던 영화는

젊은 시절의 작가(주드 로)가 호텔을 찾는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작가를 만난 제로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는

1930년대에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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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비주얼 면에서도 “프레임”을 애용한다.

앤더슨은 영화의 주요 배경인 호텔의 내부 곳곳도,

무슈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스)가 갇혀있는 구치소도,

성당의 고해성사실도, 그 외의 많은 공간도

프레임 안에 넣어서 포착하고는 그 내부에 또 다른 프레임을 배치하는 식의 비주얼을 보여준다.


앤더슨은 프레임의 크기와 내부에 담긴 색채를

내러티브와 어울리게끔 교체하는 행보를 취하기도 한다.

<부다페스트>에 등장하는 화면비율은 2.39:1과 1.37:1, 1.85:1 등이다.

각각의 비율은 해당 화면의 내러티브가 다루는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들이다.

아가사(시얼샤 로넌)가 일하는 빵집 “멘들스”와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는

분홍색이 화면 너머로까지 넘쳐흐를 것만 같은 반면,

이야기가 암울한 분위기로 펼쳐지는 어느 순간에는

색채가 다 빠져나간 흑백 화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좌우 대칭과 기하학적 구도를 강조하는 감독의 영화답게

캐릭터들은 코피를 터뜨릴 때조차도 쌍코피를 흘린다.

아가사의 왼쪽 뺨에 있는 “멕시코 모양의 반점”은 대칭 구도의 예외라 할 수 있는데,

아가사가 “예외적인 캐릭터”라는 걸 강조하려는 설정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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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과 직후의 동유럽인 게 분명하지만,

앤더슨에게 사실성 짙은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싶은 의향 따위는 없다.

구스타브와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마담 D(틸다 스윈튼)의 부고를 받고는

루츠 성으로 여행을 가면서도 호텔 유니폼 차림인 것은,

심지어 제로가 “로비 보이(LOBBY BOY)”라고 새겨진 모자까지 쓰고 있는 것은

<부다페스트>가 동화 같은 내러티브를 추구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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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화면에 많이 등장하는 문자와 문구는

영화에 동화적인 분위기와 독특한 스타일을 부여하는 동시에

내러티브를 효율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를 보면 여행 안내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각의 장소에는 해당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탈옥하는 하비 카이텔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때는 그곳이 몇 층인지를 알려주는 문구가 보이고,

죄수들이 들어가려는 곳은 환풍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문구가 보인다.

교도소 담벼락과 공중전화와 그 밖의 많은 곳에서 이런 문구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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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주인공은 제로 무스타파다.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본인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무슈 구스타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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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의외로 복잡다단한 인물인 구스타브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라 할 수 있다.

구스타브는 호텔을 찾은 노부인들과 추잡한 연애를 하며 경제적 혜택을 누리는,

그러다가 결국에는 호텔을 비롯한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는 속물적인 인물이지만,

넓은 인맥과 뛰어난 기억력을 활용하고 절도 있고 품위 있게 처신하면서

콘시어지로서 성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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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다페스트>에서 좋아하는 두 장면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구스타브는 루츠 성으로 가는 기차에서 승객들을 검문하는 파시스트들이

너덜너덜해진 신분증을 내놓은 제로를 체포하려 들자 극력 저항한다.

그는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쌍코피를 터뜨리면서도 제로를 보호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꾀죄죄한 몰골로 탈옥에 성공했건만

대기하고 있던 제로가 은신처도 마련하지 못했고

향수를 가져오는 것도 깜빡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구스타브가 제로에게 화를 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제로는 그의 고국을 멸시하는 말들을 쏟아낸 구스타브에게

자신은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고 이곳에 오게 됐다고 밝힌다.

그 말을 듣고는 자신의 언행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은 구스타브는

방금 전에 한 말을 모두 취소하고는 자책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스타브가 이 장면에서 얻은 깨달음은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바로 구스타브의 최후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제로와 아가사 부부와 함께 떠난 기차 여행에서 또다시 검문을 받는 구스타브는

이번에도 똑같은 상태인 신분증 탓에 곤경에 처한

제자이자 동료이자 친구를 위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다 결국에는 총에 맞아 세상을 뜨기에 이른다.


<부다페스트>는 살인사건과 정치적 음모와 애틋한 사랑을 두루 담아낸 영화이지만,

결국 관객의 기억에는 동화책 같은 비주얼과

속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구스타브 캐릭터가 남게 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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