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영화가 개봉된 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다.
“밑장 빼기,” “손은 눈보다 빠르다,” “이대 나온 여자” 같은 영화의 많은 대사는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와 농담이 됐다.
몇 년 전에는 곽철용(김응수)의 대사가 화제가 되면서 광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개봉 이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이 툭하면 틀어대는 작품인 <타짜>는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방송될 작품이 될 게 분명하다.
나는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한 최동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인 <타짜>를
최동훈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의 귀와 뇌리에 팍팍 꽂히는 인상적인 대사와
놀라운 흡입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매끄러운 이야기 전개라는 최동훈 감독의 강점은
겨우 두 번째 연출작인 이 영화에서 정점을 찍었다.
<타짜>는 최동훈의 시나리오 필력과 연출력 덕에
“허영만의 걸출한 원작 만화에 편승한 준수한 작품”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원작 만화와 쌍벽을 이루는 독자적인 세계를 빚어낸 수작”이 됐다.
<타짜>의 얼개는 무협 장르의 그것이다.
출중한 강호들이 즐비한 세계에 운명처럼 접어든 미숙한 청년(조승우가 연기하는 고니)이
처음에는 큰 실패를 겪고 좌절하지만
자신에게 그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고수(백윤식이 연기하는 평 경장)를 만나 그 밑에서 고된 수련을 거듭한 끝에
탁월한 실력과 신뢰하는 동료(유해진이 연기하는 고광렬)를 얻고는
스승을 죽인 자(김윤식이 연기하는 아귀와 김혜수가 연기하는 정 마담)를 찾아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무협 장르의 구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고니가 접어든 도박의 세계가
절대고수를 자처하는 고수들이 서로에게 품은 은원 때문에 충돌하면서
폭력이 난무하고 음모와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곳이라는 점도
무협 장르가 그리는 세계와 다를 바 없다.
<타짜>는 사실상 화투장을 든 무사들이 도박으로 솜씨를 겨루는 무협영화다.
그걸 강조하려는 듯, <타짜>에서 벌어지는 도박판의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싸움으로 마무리된다.
무협 장르의 얼개를 영화의 구조로 채택한 최동훈은
스타일 면에서는 누아르의 그것을 가져온다.
누아르영화에서 긴장감을 조성하려고 자주 사용하는 급격한 줌인,
도박판에 모인 사람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화면,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화면,
김상국이 걸걸한 목소리로 부른 처연한 분위기의 노래 “불나비”의 잦은 활용은
어둠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도박판이 배경인 영화에 대단히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부여한다.
감독이자 이야기꾼으로서 최동훈의 뛰어난 점은
<타짜>의 등장인물들이 실력을 겨루는 도박종목인 “섰다”의 룰을
관객에게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감독이 <타짜>를 연출했다면
도박판의 승패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관객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섰다”의 규칙을 설명해 주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경우 어떻게 될까?
이야기 전개 속도는 느려지고 긴장감은 느슨해지며 관객들의 주의력도 산만해지기 십상이다.
최동훈은 굳이 섰다의 규칙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도박에 열중한 캐릭터들이 자신의 패를 확인할 때와
상대방이 베팅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는 전략을 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걸린 판돈이 얼마고
판이 끝난 뒤 판돈을 쓸어가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그가 “섰다”의 어떤 규칙에 따라 그 판을 이겼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생각해 보라.
고니와 아귀와 정 마담이 대결하는 그 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누가 높은 패를 잡았느냐가 아니다.
고니가 “밑장을 빼서 승부를 조작하려 들었다”라고 믿는 아귀와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고니의 발뺌 중 어느 쪽이 옳으냐가 두 사람의 운명을,
나아가 갑작스러운 사태 전개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정 마담의 운명을 결정한다.
관객은 섰다의 규칙을 모르더라도 그 결과를 이해하는 데 조금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 글을 쓰려고 <타짜>를 다시 보면서 예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의문을 품게 됐다.
<타짜>는 근본적으로 정 마담이 고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정 마담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는 누구인가?
영화는 아귀와 정 마담을 응징하고 판돈을 챙긴 고니가
기차에서 용해(백도빈)와 싸우다가 두 사람 다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지는 걸 보여준다.
그러고서는 형사들이 정 마담을 데려와 수습한 시신이 고니의 시신인지 확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 마담의 이야기는 형사들을 상대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 마담의 내레이션은 이 장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정 마담의 회고는 관객을 상대로 한 것일까?
물론, 이 의문은 <타짜>의 걸출함을 훼손할 정도로 거창한 의문은 아니다.
<타짜>에는 매력적인 대사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이 대단히 많다.
일확천금을 안겨주는 도박의 짜릿함에 중독된 인간군상이 보여주는
다채롭고 강렬한 모습들을 담아낸 장면들 하나하나는 관객의 뇌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데,
그 많은 장면 중에서 내 기억에 특히 오래 남은 장면은 “도박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 마담이 관리하는 도박장에서 선수로 뛰는 고니는
자식의 수술비를 잃은 교수(최종률)를 상대하게 된다.
밑천을 다 털리고 풀 죽은 모습으로 터덜터덜 도박장을 떠나는 교수가 안쓰러웠던 고니는
수술비로 쓰라며 돈을 챙겨주고는 다시는 도박장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고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교수는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도박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도박꾼들이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조차 아까워 앉은자리에서 소변을 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과 더불어,
도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도박에 미치면 사람이 어느 수준까지 굴러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이 장면을 보며 그런 깨달음을 얻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도
막상 도박에 중독되고 나면 도박판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아찔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