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을 정(晶), 벗 붕(朋) 등
앞의 글에서는 음양오행의 오행(五行)에 들어가는 글자들 중
木, 火, 土, 金 네 글자를 다뤘다
지식이 짧아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水가 중복된 글자는 없다고 알고 있다).
이번 글은 동양천문학에서 “칠정(七政)”이라고 부르는
“해(日), 달(月), 목성(木星), 화성(火星), 토성(土星), 금성(金星), 수성(水星)” 중
오행에 해당되지 않는 두 글자인
“해 일(日)”과 “달 월(月)”이 중복된 글자들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日”이 중복된 글자로 오해받는 글자 얘기부터 하자.
“창성할 창(昌)”은 슬쩍 봐서는 “日”이 위아래로 놓여있는 글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건 “日”을 양 옆으로 늘여놓은 글자처럼 보이는 “말씀 왈(曰)” 위에
“日”을 올려놓은 글자다.
옥편을 보면 “昌”은 “태양 아래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글자”라고 설명돼 있다.
이 글자에 “입 구(口)”를 합쳐 “노래하다”는 뜻을 더욱 강조한 글자가
“독창(獨唱),” “합창(合唱)” 등의 단어에 들어가는 “노래 창(唱)”이다.
“日”을 두 개 모아놓은 글자는 없지만 세 개 모아놓은 글자는 있다.
바로 “밝을 정(晶)”이다.
눈부셔서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밝은 태양을 세 개나 모아놓았으니
“눈이 부시다 못해 멀어버릴 듯하다”는 뜻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 이 글자는
“수정(水晶),” 깨지기 쉬운 휴대폰의 “액정(液晶)” 같은 단어에 쓰인다.
“고기 육(肉)”이 변형된 글자인 “육달월(月)” 부수를 보면
한자문화권에서는 “달(月)”과 생명체의 “몸(身)”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月”이 두 개 중복된 글자인 “벗 붕(朋)”에 대한 얘기만 하겠다.
“육달월(月)”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동양사회에서는 “벗”을 두 사람의 몸뚱어리가 나란히 있는 관계로 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신적 교류에 대한 표시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교우관계라는 것도 일단 상대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반영됐을 거라고 납득해 본다.
많이들 아는 쉬운 한자들이 중복된 글자도 많다.
“물품(物品),” “품질(品質)” 등의 단어에 쓰이는 “물건 품(品)” 얘기부터 하자.
언뜻 보기에 “品”은 “입 구(口)”를 세 개 모아놓은 글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글자에 쓰인 “口”는 “입”이 아니라 “그릇”을 가리키는 글자다.
한자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쓰이던 “그릇의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가
조금씩 변형되는 과정을 거친 끝에
“입”을 가리키는 글자와 똑같은 모양이 된 것이다.
따라서 “品”은 “세 개의 입”이 아니라 “세 개의 그릇”이 모여 있는 상황을 묘사한 글자로,
각각의 그릇에 여러 종류의 물건이 담겨있다는 점을 감안해
“온갖”이나 “가지런하다”는 뜻도 갖게 됐다.
이외에도 “돌 석(石)”을 세 개 모아놓으면 “돌무더기 뢰(뇌, 磊)”가 된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글자들 말고,
상대적으로 복잡해 보이는 글자들이 중복 사용돼 만들어진 글자들도 있다.
“수레 차(車)” 세 개를 모아놓은 글자인 “울릴 굉(轟)”이 그런 글자다.
수레 세 대가, 또는 자동차 세 대가 한꺼번에 요란하게 질주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글자를 보면
“굉음(轟音)”이 느껴질 것이다.
“용(龍)”은 12지(支)를 구성하는 12종의 동물들 중에서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다.
“龍” 한 마리를 글자로 쓰려면 16번의 획을 그어야 한다.
그런데 16획이나 되는 글자인 “龍”을 두 마리, 나아가 세 마리나 모아놓은 글자들도 있다.
용 두 마리를 모으면 “두 마리 용 답(龖)”이 되고
세 마리를 모으면 “용이 가는 모양 답(龘)”이 된다.
굉장히 간단한 글자가 모여서 만들어진, 우리의 허를 찌르는 글자가 있다.
이 글자 얘기는 조선시대의 정조(正祖) 임금과
그의 총애를 받던 신하인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한다.
어느 날 정조와 정약용이 같은 글자를 세 번 반복해 만들어진 한자를 누가 더 많이 아는지 내기를 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는데,
앞의 글과 이 글에 등장한 한자들은 두 사람의 대결에 당연히 등장했을 것이다.
솜씨를 치열하게 겨룬 끝에 승리한 최종 승자는 정약용이었는데,
정약용이 막판에 몰린 정조에게 내놓은 글자는
“한 일(一)”을 세 개 모아놓은 “석 삼(三)”이었다.
어떤가?
여러분도 정조처럼, 그리고 나처럼 허를 찔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