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축구>
주성치가 연출한 영화들은 (그리고 그가 출연했던 일부 영화들은)
“싼마이”라고 무시하기에는 꽤나 심오한 인생 교훈이 담겨있으면서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인생철학을 얻겠다며 진지하게 감상하기에는 너무 유치한 작품들이다.
“쿵후와 축구를 결합”시킨 <소림축구>도 예외는 아니다.
“헌신적인 마음가짐으로 쿵후를 수련했지만
쿵후와 쿵후정신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자기 살 길에만 정신을 쏟는 각박한 사회 현실에 무릎 꿇고는
힘겨운 삶을 꾸려가는 소림 제자들이 축구를 통해 진정한 쿵후 정신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흔해 빠진 줄거리를 펼치는 <소림축구>의 피식거리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코믹한 장면들 아래에는
보는 사람을 뭉클하게 만드는 짠함과 애틋함과 뭉클한 정서가 놓여있다.
주성치 영화가 즐겨 다루는 캐릭터는 주류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인물들,
그들조차 자신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소림축구>의 축구단 감독과 쿵후 수련생 출신 단원들과 만두가게 점원은
추레하고 볼품없으며 어딘가 한 구석이 모자란 듯 보이는 사람들이다.
주성치는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수모와 굴욕을 보여준 후
이들이 자존감을 되찾고는 기성사회에 반격을 시도한 끝에
어렵사리 성공을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즐긴다.
<소림축구>는 가슴 훈훈한 결말을 관객에게 선사하지만,
주성치 영화답게 주체 못 할 정도의 과장과 허풍이 듬뿍 가미된 B급 코미디의 경로를 통과한 끝에야
그런 결말에 도달한다.
아성(주성치)이 찬 깡통이 아득히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가 시야를 벗어난 이후에
명봉(오맹달)이 한참 떨어진 담벼락에 그 깡통이 꽂혀있는 걸 발견하는 설정은
영화의 다른 뻥튀기된 설정들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주성치는 관객들이 <소림축구>의 (그리고 <쿵후 허슬>을 비롯한 다른 연출작들의)
허황된 설정과 장면들을 보면서 어처구니없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
즐겁게 깔깔거리게끔 만드는 묘한 능력을 갖고 있다.
소림축구단 단원들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능력을 필드에서 발휘하려 할 때마다
그들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게 만드는 것도,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날아오는 공을 막으려는 골키퍼의 장갑과 유니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결국에는 골키퍼조차 멀리로 튕겨져 나가게 만드는 장면도
다른 감독들 손에서는 만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유치 찬란한 장면이 돼버릴 공산이 크지만,
주성치의 손에서는 유쾌한 만화의 즐겁고 재미있는 한 장면으로 빚어진다.
2000년대 초에 공개된 영화인 <소림축구>에 구현된 CG가
실사장면들과 어우러지지 않으면서 CG라는 게 확연하게 보이는 어설픈 수준인 것도
<소림축구>의 B급 정서와 잘 어울리면서 묘한 장점으로 탈바꿈된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요즘의 감쪽같은 CG가 <소림축구>에 구현됐다면
허무맹랑한 만화 같은,
아니 그런 만화 자체인 <소림축구>는
이야기와 화면이 제대로 엇물려 돌아가지 못하는 이질적인 영화가 됐을 것이다.
주성치는 그가 만든 작품들에서 이소룡과 쿵후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내왔다.
심지어 소림축구단의 골키퍼 소룡(진국곤)은
이소룡과 비슷한 생김새로 이소룡 특유의 모션을 취하기도 한다.
<소림축구>의 선악구도에는 그가 품은 이런 존경심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영화의 메인 빌런인 강웅(사현)이 꾸린 마귀축구단의 단원들은
강화군인인 “캡틴 아메리카”처럼 약물을 주입한 덕에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된 반면,
소림축구단의 아성과 사형들은 긴 세월 동안 피와 땀을 흘리는 꾸준한 수련을 통해 키워온
각자의 무공에서 비롯된 실력을 발휘한다.
아성과 아매(조미)가 하게 되지만 각자의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아련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것도 주성치 영화다운 부분이다.
아매가 아성에게 돌려주는,
해지고 구멍 난 곳들에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수선한 낡아빠진 운동화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지극한 애정을 상징하는 소품이다.
주성치가 출세작인 <도성>에서 <지존무상> 같은 유명한 홍콩누아르 영화의 시그니처라 할,
주인공 캐릭터들이 슬로모션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슬로모션처럼 느린 속도로 연기해 패러디한 것은 유명하다.
<소림축구>를 보다 보면 홍콩영화의 앞선 히트작들을 패러디하거나 오마주한 듯한 요소들이 보인다.
원조 황금다리인 명봉이 자신을 불구로 만든 강웅 앞에서 다리를 절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모습은 <영웅본색>에서 절뚝거리던 주윤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성과 아비(황일비)가 나이트클럽에서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공연하는 모습을 볼 때는
그 노래가 쓰였던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떠오른다.
아성의 거처가 있는 빌딩 옥상에 사형과 사제들이 슬로모션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앞서 밝혔듯 홍콩누아르 특유의 비장한 등장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 글을 쓰려고 <소림축구>를 다시 보면서 배꼽을 잡은 장면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아성과 아비의 나이트클럽 공연 장면이다.
주성치는 아성과 아비가 펼치는 처참한 공연을 관람해야만 했던 내 심정을
(심히 과격한 방식으로) 대변하는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연출해 내는 연출력을 발휘한다.
그 덕에 우리는 연신 얻어맞는 두 사람이
건달들에게 “그만 때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잔인한 장면을 보면서도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코미디 재능이 없는 감독이라면 이런 장면을 이렇게 웃기게 연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소림축구>를 보노라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쿵후 수련은 축구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개인적으로는 유연성을 키우거나 근력 증대에 나쁠 건 없겠지만
쿵후와 축구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운동일 거라고,
“쿵후를 축구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소림축구”를 현실에서 펼쳐 보이려 노력하는 듯 보이는
중국 국가대표 축구팀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소림축구>를 보노라면,
“쿵후와 축구의 결합”은 가능한 일이고
쿵후 수련과 쿵후 정신은 인류의 행복과 복지 향상에 큰 도움을 줄 거라는 주성치의 설득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