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단지"를 본뜬 글자를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유!!!

닭 유(酉)

by 윤철희

제빵 장인이 자기 이름을 간판에 내걸고 운영하는 빵집에 간 적이 있다.

빵집 특유의 달달한 냄새가 진동하는 매장에 들어섰을 때 제일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빵이었지만

잠시 후 내 시선을 잡아 붙든 것은

벽 전체를 가득 채운 빵 그림 옆에 적혀 있는 “반죽을 자연 발효시킨다”는 내용의 글귀였다.

글귀에 들어있는 “발효”는 한자로 적혀있었는데,

“醱酵”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두 글자에 모두 들어있는 글자인 “닭 유(酉)”가 유달리 크고 선명하게 눈에 꽂혔다.


“酉”는 음양오행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이래로 줄곧

내가 이해하려고 고심하던 문제 중 하나였지만 아직도 명쾌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많이들 알다시피,

“酉”는 12지(支)를 구성하는 12가지 동물 중 “닭”에 해당하는 글자다.

“酉”가 “닭”이라는 뜻을 어떻게 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酉”는 “술을 빚는 술 단지의 모양”을 본뜬 상형자라서

원래는 “술”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였다.

그러다가 “술”이라는 뜻보다는 12지에 속한 지지(地支)를 지칭하는 쓰임새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지자

“술”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삼수변(氵)”을 붙인 “술 주(酒)”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酉”에 “술”이라는 뜻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글자들도 있다.

대표적인 글자가 “취할 취(醉)”다.

나는 “醉”를 “술(酉)에 취한 사람은 장기판의 졸(卒)이나 병졸(兵卒) 같은 하찮은 존재가 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로,

그러니까 “취해도 적당히 취하자”는 (달리 말하면 “개가 되지는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글자로

이해하고 있다.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인 “의사(醫師)”와 그가 행하는 “의술(醫術)” 등의 단어에 들어있는

“의원 의(醫)”는 “酉”에 여전히 “술”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글자다.

“醫”의 윗부분에는

환자의 몸에 꽂혀있던 “화살(矢)”을 빼내 상자에 담아놓은 것을 형상화한 글자와

“몽둥이 수(殳)”가 합쳐진 글자인 “앓는 소리 예(殹)”가 놓여있다.

그리고 화살에 맞고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환자가 신음하는 상태를 나타낸 글자 아래에는

그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소독용 알코올(술)”인 “酉”가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그런데 내가 “酉”라는 글자를 긴 세월 동안 고심해 온 이유는 “술”이라는 뜻 때문이 아니었다.

음양오행에서 “酉”는 “초가을”을 나타내는 글자인 “신(申)” 다음에 등장하는 글자로

“본격적인 가을”인 “한가을”을 가리킨다.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추수에 여념이 없는 계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酉”가 이 계절을 나타내는 글자가 된 걸까?


내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이 계절에 수확한 곡물 앞에는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단계”가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술”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이나 각종 과일이

발효 과정을 거쳐 “알코올성 음료”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고,

역시 “酉”가 들어있는 글자인 “초 초(醋)”(또는 “식초(食醋)”)도

발효 과정을 거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자연에서 얻은 수확물 앞에 놓인 “새로운 존재”는 무엇인가?

보관이나 유통 과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해서 부패한 물질이 되거나

앞서 언급한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이나 “식초” 같은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쪽 과정이건, 화학적으로는 똑같은 과정이다.

부패와 발효 모두 동일한 화학과정을 거치는 건데

인간을 기준으로 볼 때 인간에게 유익한 결과물이 나올 경우에는

“발효 과정”을 거쳤다고 부른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술 괼 발(醱)”은 “술이나 식초가 발효되는 과정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고

“술밑 효(酵)”는 “음식물을 삭히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자

“醱”과 마찬가지로 “발효과정에서 거품이 나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다.

글 첫머리에 거론한 제빵과정에서 반죽에 투입되거나 술을 양조하는 과정에 투입하는 물질인

“효모(酵母)”라는 단어에도 “酵”가 들어간다는 것을 주목하라.


“酉”가 대표하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변신과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긴 세월을 거쳐 얻은 결과물은 인간에 유익한 것일 수도 있고 유해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는,

그리고 우리가 하는 여러 행동은 차츰차츰 부패가 될 수도 있고 발효가 될 수도 있다.

모쪼록 훗날 그 긴 세월이 “발효에 필요한 기간”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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