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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n 13. 2024

<머니볼>은 무엇에 대한 영화인가?

베넷 밀러 감독의 <머니볼>은

메이저리그 야구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치른

2002년 시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렇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

100퍼센트 실제 사건인 건 아니다.

빼어난 시나리오작가 스티븐 제일리언과 애런 소킨은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영화를 위해 가공하고

일부 요소는 창작해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자판기” 관련 에피소드들은 창작된 것이다.

영화에서,

양키스에서 애슬레틱스로 이적해 온 선수는

라커룸의 음료 자판기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런데 애슬레틱스 라커룸의 음료수는

실제로는 공짜였다고 한다.

시나리오작가들은

가난뱅이 애슬레틱스의 현실을 강조하려고

실제 사실과는 다른 얘기를 한 건데,

애슬레틱스 구단이 억울하게 여길 이 설정은

영화에 재미를 더하고 주제를 강조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유료 자판기” 설정은

원정지로 향하는 전용기 장면에 다시 등장해

애슬레틱스가 비용을 비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데 활용되고,

다른 팀과 트레이드 협상을 하던 중에

은근슬쩍 음료수 비용을 마련하는

빌리 빈(브래드 피트)의 탁월한 수완을 보여주는 데에도 활용된다.



<머니볼>이라는 제목답게

양키스와 애슬레틱스 선수들의 연봉을

비교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는

내내 “머니” 얘기를 해댄다.

선수들의 연봉,

1승을 거두는 데 들어간 비용,

빌리 빈을 “역사상 최고 연봉을 받는 단장”으로

만들어줄 제안에 이르기까지.


프로야구팀을 다루는 영화이니만큼

작품 내내 “볼”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영화에 흔히 등장해서

관객을 흥분시키는 야구 장면은

<머니볼>에 없다.

<머니볼>은 애슬레틱스의 성적을 전하는

캐스터들의 실망하는 목소리나 열광하는 목소리를

자료화면과 함께 담담하게 들려주기만 한다.


새로운 관점을 밀고 나가는 이는 외롭기 마련이다.


<머니볼>은 “머니”에 대한 영화도,

“볼”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머니”에 바탕을 둔 의사결정을 했다가 좌절한 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볼”을 다루는 선수로는 실패했고

단장으로서도 실패만 경험해 온 사람이

“가난한 구단을 우승시켜 변화를 일으키고”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고군분투를 다룬 영화다.

<머니볼>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정말로 빼어나다.

빌리 빈이 원하는 선수를 얻으려고

상대 팀 단장들을 계속 바꿔가며

통화하는 협상 장면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협상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트레이드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따라잡기 힘들지만,

빌리 빈이

상대를 쥐락펴락하며 진행하는 협상이 성공하면

관객은 빌리 빈만큼이나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머니볼>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자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장면은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회의장면들,

그중에서도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나오는 회의장면이다.

 <머니볼>의 회의장면들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할까?

핵심 선수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누구로 채울 것인지를 논의하는

첫 회의를 보자.

햇볕에 그을린 노년의 스카우터들은

이런저런 기준으로 선수들을 평가하는데,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는

“경쾌한 타격음”과 “여자친구의 미모” 같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들도 있다.


노땅들 틈에 있다 보니 더 젊어 보이는 빌리 빈은

노인네들이 주고받는 얘기가 지긋지긋하다.

틈틈이 등장하는 회상장면에서 보듯,

무엇보다도 빌리 빈 자신이

노땅 스카우터들이 채택한 기존의 평가기준에 의해

유망주라는 절찬과 기대를 받으며 선택됐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선수생활을 접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선수 시절의 빌리 빈은 기존 관점이 실패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이 장면은 조직생활을 하는 우리가

흔히 접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보여준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다를 수 있다”는

문제 말이다.

“애슬레틱스의 우승”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은 다 자기 처지에 따른 목표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마련이다.


스카우터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자신이 발굴한 선수가 슈퍼스타가 되는 것,

그래서 “내가 이렇게 선수 보는 눈이 좋은 사람”이라고 으스대며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성공할 선수의 발굴”이라는 미시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단장인 빌리 빈의 목표는 다르다.

그는 “팀의 우승”이라는

거시적인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사람이다.

선수 한두 명이 잘한다고

팀의 승리와 우승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선수가 모여 플레이하는

팀의 승리와 우승을 갈망한다.


그렇기에 빌리 빈과 스카우터들의 의견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니

팀이 성공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위에

“불화”라는 새로운 문제가 덧붙여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빌리 빈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투자금액이 팀 성적을 좌우하는

잔인한 머니게임이 일상이 된 메이저리그에서

가난한 애슬레틱스 구단이 도태되지 않으려면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키스 같은 부자구단들에게

착취당하는 신세를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이단으로 취급받는 방법론을

받아들이자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머니볼>은

머니게임이 벌어지는 냉혹한 시장에서

제한된 자원 밖에 없는 인물이

그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목표를 달성하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관점을 채택하고는

기존의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을 이겨내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는 드넓은 공간에 홀로 있는

빌리 빈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이 많다.


영화는

“기존 관점은 모두 틀렸고 새로운 관점은 모두 옳다”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세이버매트릭스 방법론을 채택해

변화를 시도하는 빌리 빈 자신도

그 방법론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영화 내내 반신반의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감독이 총애하는 선수를 트레이드하는

극약처방을 내리기까지 한다.


<머니볼>의 빌리 빈은

극단적인 변화를 통해 한 시즌을 성공시키지만

그 시즌도 결국에는 패배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또 다른 시즌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즌은 성공할까, 실패할까?

어느 쪽이건 그 뒤에는 또 다른 시즌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잠깐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세상은 변할 것이고

우리는 변한 세상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또다시 변신하는 쪽을 선택할 것인지 여부를

결단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빌리 빈이다.


딸은 노래한다. 아빠는 "루저"라고. 그래도 "쇼를 즐기라"라고.

시즌 마지막 게임에서 또다시 패한 빌리 빈은

딸의 노래에서 위안을 찾으려 든다.

딸은 노래한다.

“아빠는 루저(loser)”라고.

그렇지만 “인생은 미로 같고 어렵지만

걱정을 떨쳐버리고 쇼를 즐겨야 한다”라고.

결국 야구는 “그깟 공놀이”일 뿐이잖나?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건 “그깟 공놀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애슬레틱스는

2028년에 라스베이거스로

연고지를 옮길 예정이란다.

역시... 돈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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