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마블의 슈퍼히어로물이 궁지에 몰렸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 웬만한 자극에는 둔감해진 관객들을 더 흥분시키기 위해
점점 더 강한 빌런(들)을 등장시켜
슈퍼히어로들을 더 아슬아슬한 위기로 몰아넣어야 하는
슈퍼히어로물의 특징은 장르 자체를 난국에 몰아넣었다.
그런데도 마블은
슈퍼히어로물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정점에 다다르면서
내러티브와 비주얼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게 명확해 보이는 시점에서도
흥행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는
“평행우주”라는 중독성 강한 설정에 손을 댔고
그 결과는, 간혹 수작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숨 나오는 영화들을 연달아 내놓는 거였다.
반면, “평행우주”의 독성에 중독된 스튜디오인 마블이 아니라
스파이더맨 캐릭터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 소니가 제작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평행우주”를 활용하면서도
“평행우주”에 내재된 유독성을 회피하는 영리한 영화다.
엄청나게 많이,
어쩌면 무한히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된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각각의 스파이더맨들을 한 우주에 모은다는
<뉴 유니버스>의 설정은
결국에는 마블이 만드는 스파이더맨의 실사영화 시리즈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영향을 주기까지 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기막힌 비주얼이 완벽하게 결합된
<뉴 유니버스>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부터 슈퍼히어로물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만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거였다.
조금은 극단적인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근거는 여러 개 있는데,
그것들은 실사영화 슈퍼히어로물의 약점들과 관련이 있다.
실사영화 슈퍼히어로물을 괴롭히는 첫 번째 약점은
“주연배우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히트한 영화의 속편을 찍으려면
슈퍼스타가 된 배우들에게 갈수록 막대한 출연료를 지불해야 한다.
혹시라도 배우가 다치거나 급격히 노화되거나
추잡한 스캔들에 연루되는 등의 문제로
스타의 매력이 심하게 떨어지기라도 하면
시리즈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그런 걱정이 없다.
출연료를 더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나이를 먹지도 않고 부상당할 걱정도 없으며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할 짓을 저지를 염려도 없다.
제작진이 구상하는 액션은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척척 해낸다.
평행우주 수백 곳에서 활약하는 슈퍼히어로들을 보여주고 싶으면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한 작품에 모을 수 있다.
두 번째 약점은
관객에게 전편(들)보다 더 짜릿하고 황홀한 비주얼을 선사하기 위해
동원해야 하는 특수효과 때문에
제작비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온갖 첨단기술을 총동원해서 구현한 비주얼도
관객에게 제대로 먹혀 들 거라는 걸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걱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뉴 유니버스>를 만드는 데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첨단기술이 활용됐을 테지만,
실사영화만큼 값비싸고 품이 많이 드는 효과가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 번째 약점은
그렇게 막대한 제작비를 동원해도 구현하기 힘든 비주얼이 있다는 것이다.
영상 기술의 발달 덕에 그런 비주얼의 영역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에는 비주얼의 제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뉴 유니버스>가 보여주는 만화 같은 비주얼과
뉴욕을 누비는 스파이더맨을 따라다니는 역동적인 화면을 생각해 보라.
<뉴 유니버스>의 장점에는
실사영화를 구속하는 굴레들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얻은 것들만 있는 게 아니다.
<뉴 유니버스>는 여러 편의 실사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익숙한 스파이더맨 캐릭터인 피터 파커가 아니라,
스파이더맨 원작만화의 열혈팬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흑인 캐릭터인 마일리 모랄레스를 선택하는 것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참신함을 불어넣는 묘수를 썼다.
그 덕에 벤 삼촌이 죽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야 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그런 고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노 웨이 홈>처럼 똑같은 스파이더맨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의 (하다못해 돼지인) 스파이더맨들을
한 우주에 모은 것도 <뉴 유니버스>의 장점이자 즐거움이다.
차출 돼온 여러 스파이더맨(?)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재패니메이션(또는 아니메) 스타일의 우주에서 온
페니 파커의 스파이더맨(이렇게 불러도 되는 건가?)이다.
페니 파커를 마징가 Z나 패트레이버처럼
인간이 탑승한 로봇 형식의 스파이더맨으로 묘사한 것은
<뉴 유니버스> 제작진이
재패니메이션 스타일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절묘하게 활용했다는 걸 보여준 좋은 증거다.
흑백 우주에서 활동하는 스파이더맨 누아르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뉴 유니버스>가 선택한 평행우주 설정의 장점은 빌런 측면에서도 발휘된다.
제작진은 실사영화에도 등장했던 닥터 옥토퍼스를
여성 빌런인 닥터 올리비아 옥토비우스로 탈바꿈시키는 것으로
실사영화에서 기존 캐릭터를 봤던 관객에게
익숙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렇게 참신하고 탁월한 선택들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고 해도
영화의 성공에 중요한 것은
결국 내러티브를 적절하게 전개하는 것인데,
<뉴 유니버스>는 그것도 굉장히 잘 해낸다.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인기를 얻은 요인 중에는
피터 파커가 어른들이 이뤄놓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숙한 청소년이라는 점도 있었다.
<뉴 유니버스>의 주인공 마일리 모랄레스도
새로 전학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모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받은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10대다.
그 점을 제대로 반영한 <뉴 유니버스>는
새로 얻은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진입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년이 방황 끝에 능력을 통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기까지
성장 과정을 그린 영화가 되면서 관객의 공감을 얻는다.
<뉴 유니버스>의 액션 장면은 하나같이 탁월하다.
만화책처럼 연출한 비주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관객의 반응을 쥐락펴락하는 리듬감,
화면과 잘 어울리는 사운드트랙 등 무엇 하나 탓할 거리가 없는 빼어난 장면들이다.
그중에서도 굳이 한 장면을 꼽아야 한다면
각성한 마일리가 새로 얻은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웹 슈터를 장착하고는
“진짜” 스파이더맨으로서 고층빌딩에서 지상으로 다이빙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상하가 180도 뒤집힌 시점으로
그를 포착한 정말로 인상적인 장면을 꼽겠다.
단지 카메라를 뒤집는 것만으로도
스파이더맨이 지상으로 낙하하는 게 아니라 하늘로 비상하는 것 같은,
수중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빚어내는 것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그렇게 고요하고 정적인 장면을 보여준 직후에
맨해튼을 헤집고 다니는 속도감 넘치는 짜릿한 장면을 이어 붙인 연출력은 정말로 기가 막히다.
<뉴 유니버스>는 마블의 임원들이 반드시 보면서
향후 만들 영화들을 위한 교재로 삼았어야 하는 영화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옳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블 임원들이 지금이라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평행우주를 제대로 활용하는 이 영화를 열심히 연구해봤으면 한다.
이후에 모든 장편영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문제도 아울러 고민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