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여성의 몸에도, 우주에도 있다

집 궁(宮)

by 윤철희

넷플릭스 영화 <전,란>에는

의주까지 도망갔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 근거로 “집 궁(宮)”자의 자원(字源)을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문제 많은 임금으로 꼽히는 왕이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그가 하는 글자 “宮”에 대한 설명은 틀리지 않았다.


“宮”은 “갓머리 면(宀)”“음률 여(呂)”가 합쳐진 글자다.

“宀”은 “집 가(家),” “집 택(宅),” “집 우(宇),” “집 주(宙)” 등의 글자에서 보듯

“사방이 지붕으로 덮여있는 집”을 가리키는 글자이고,

“呂”는 “등골의 뼈가 죽 이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다.

영화 속의 선조는

“나라의 등골에 해당하는 궁궐이 똑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경복궁을 재건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宮”을 지붕이 있는 꽤 큰 건물을 가리키는 글자라고 봤다.

원래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

“사당(祠堂)”을 가리키는 글자였지만(이 뜻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에 “왕(王)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궁전(宮殿)”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임금이 사는 곳”을 가리킬 때 “궁전,” “궁궐,” “대궐” 등을 혼용한다.

그런데 “궁궐(宮闕)”이라는 단어에서

“宮”은 무엇을 가리키고 “闕”은 무엇을 가리킬까?

“宮”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는 공간,

그리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현재의 경복궁을 예로 들면,

근정전을 비롯한 주위의 여러 건물이 “宮”이다.

한편, “대궐 궐(闕)”은 한 나라의 중심인 “宮”이라는

중요한 공간을 보호하고 수비하기 위한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가리킨다.

다시 경복궁을 예로 들면,

경복궁의 주변을 둘러싼 돌담과 광화문,

지금은 도로 한복판에 동떨어져있는 동십자각이 모두 “闕”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宮”과 “闕”은 따로따로 떼어놓고 사용할 수 없는 글자들이다.


궁궐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도 있다.

28개의 별자리인 “28수(宿)”를 바탕으로 삼는 동양천문학에서는

하늘에 자미궁(紫微宮)이라는 게 있다고 본다.

그럴싸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중국집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자미궁은 큰 곰자리를 중심으로 한 170개의 별로 이뤄진 별자리다.

태미원(太微垣)ㆍ천시원(天市垣)과 더불어 삼원(三垣)이라고 부르는데,

“담 원(垣)”은 “담장,” “울타리,” “관청”을 가리키는 글자다.

자미궁이라는 이름은 별자리를 천자(天子)의 자리에 비유한 것으로,

천자가 거주하는 곳이니 궁궐이라고 본 것이다.


“宮”은 땅과 하늘만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도, 정확히는 여성의 몸 안에도 있다.

여성의 몸에 있는,

임신한 태아를 출산할 때까지 소중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곳인 “자궁(子宮)”이 그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10개월 가까운 꽤 긴 기간을

자궁에서 살았다는 걸 감안하면,

우리는 모두가 궁궐 생활을 했던 왕족인 셈이다.


인간을 자궁이라는 존엄한 공간을 거쳐 태어난 존재라고 봐서 그런 것인지,

인간의 운명과 관련한 이치를 살피는 학문인 명리학(命理學)에서도

“宮”이라는 글자가 사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편과 아내가 혼인으로 이어진 후 어떤 화합(化合)을 보여줄 것인지를

가리키는 단어인 “궁합(宮合)”이다.


“宮合”에서 “宮”은

연월일시(年月日時)라는 네 기둥(四柱) 중에서

태어난 날의 갑자(甲子)를 뜻하는

일주(日柱)의 지지(地支)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남자의 사주에서 그 위치는 “아내가 거주하는 궁”이라는 뜻에서

“처궁(妻宮)”이라고 부르고

여자의 사주에서 그 위치는 “남편이 거주하는 궁”이라는 뜻에서

“부궁(夫宮)”이라고 부른다.

“宮合”을 보는 것은 “처궁”과 “부궁”이 얼마나 잘 화합하는지를 가늠하는 작업이다.


소중한 존재가 기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宮”에는

흔히 생각하기 어려운 뜻이 있기도 하다.

여성의 몸에 생식과 관련한 기관으로 자궁이 있다면,

남성의 몸에는 고환이 있다.

옛날에는 남성의 몸에서 고환을 제거하는 형벌이 있었는데,

그 형벌의 이름이 “궁형(宮刑)”이었다.

궁형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이 받은 형벌로 유명하다.


등뼈를 곧바로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고

그걸 세우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느끼는 고단함은 얼마나 심할지 생각해 보라.

“宮”이라는 글자에 대해 배우면서,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이 조선 말기의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고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는 걸,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만들면서

경복궁을 제대로 써본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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