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원작 영화는 앞으로 이 영화처럼 만드는 걸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by 윤철희

나는 게임 원작 영화에 대해 편견이 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있다.

게임 원작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발끈할 얘기일 테지만,

내가 처음으로 본 게임 원작 영화가

<스트리트 파이터>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나를 마냥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장클로드 반담이 주인공 가일로 출연한 바로 그 영화 말이다.

게임 원작 영화에 대한 기억은

<DOA> 같은 영화를 겪으며 더 나빠지기만 했다.


게임 원작 영화들은 어째서 내가 편견을 갖게 만든 걸까?

그건 영화 제작진이 영화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게임을 즐기는 엄청난 규모의 팬들 중 일부가 극장으로 몰려올 테니

흥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모르는 이들이

게임을 만든 이들이 구축한 세계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한 고민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 결과,

해당 게임을 즐기는 팬이라면 너무도 잘 알고 즐거워할 테지만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동전 넣고 게임하던 날들 이후로는

게임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나처럼)

해당 게임에 구현된 세계관과 캐릭터와 아이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일쑤다.

아는 사람만 알고 즐길 수 있는 영화,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조차 코웃음을 치거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 스크린에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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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게임 원작 영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모탈 컴뱃>이나 <툼 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등은

(시리즈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1편은)

게임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괜찮은 영화였다.

이 영화들의 특징은

그 자체가 진입장벽인 게임의 세계관을

무턱대고 관객에게 들이미는 영화도 아니고,

게임의 세계관을 시시콜콜 관객에게 설명하려고

지나치게 지루하게 전개되는 영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다는,

게임 원작 영화가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을 충족시킨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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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도 이름을 아는

유명한 게임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가 원작인

조너선 골드스틴과 존 프랜시스 데일리 감독의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이하 <던전 앤 드래곤>)도

잘 만든 게임 원작 영화의 대열에 합류한 영화이자

관객을 계속해서 즐겁게 해주는 굉장히 잘 만든 오락영화의 전형이다.

원작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더 큰 재미를 느낄 테지만

(원작 게임을 모르는 나 같은) 관객도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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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앤 드래곤>은

명예로운 기사였다가 도적으로 전락한 에드긴(크리스 파인)이

여전사 홀가(미셸 로드리게스)와 함께

(석방이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탈옥을 감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에드긴과 홀가가 감옥에 갇힌 건

풋내기 소서러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과 사기꾼 포지(휴 그랜트),

위저드 소피나(데이지 헤드)와 함께
세상을 떠난 에드긴의 아내를 부활시키는 데 쓸

“부활의 서판”을 훔치려 시도하던 중에

(포지와) 소피나가 배신한 탓이었다.

탈옥한 에드긴과 홀가는 사이먼과 드루이드 도릭(소피아 릴리스)을 설득해

그들과 함께 더 큰 모험과 음모의 세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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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토리는 각자 특유한 능력과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모험에 도움을 줄 아이템들과

모험을 위태롭게 만들 위험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스테이지를

차례차례 돌파하고 성장하면서

게임 클리어를 향해 나아가는 전형적인 게임 스타일로 전개된다.

<던전 앤 드래곤>의 빼어난 점은

게임 특유의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잘 활용하면서도

게임 원작이라는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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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럽게 펼쳐지는 스토리는

캐릭터들이 이 영토에서 저 영토로 이동하는 것에

충분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졸작 영화들이

관객에게 상황을 이해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

정신없이 몰아치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과 달리,

<던전 앤 드래곤>은 관객들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완급을 조절하면서 여유로운 행보를 취한다.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성을 가진,

원작 게임을 즐기는 팬들이라면

무척이나 반갑게 느낄 영토들을 여행하는 장면을 연이어 제시하면서도

게임을 모르는 관객을 소외시키지는 않는다.

스토리 대신 관객의 눈을 휘둥그레 뜨게 만들

특수효과 비주얼로 승부를 걸려는 듯

그런 분야에만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다른 게임 원작 영화들과 달리,

<던전 앤 드래곤>의 비주얼은

게임 특유의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고

세계들의 개성을 제대로 구현하면서도 지나치게 튀어 보이지는 않는

안정적인 화면으로 스토리와 균형을 맞춰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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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하고 재미있는 유머는 덤이다.

무덤에 묻혀있는 죽은 자를 깨워

다섯 개의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이 재미있는데,

그중에서도 질문을 네 개만 받은 탓에

영면(永眠)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시체의 경우는 특히 더 재미있다.

영화를 마무리하는 사기꾼 포지의 장면도

영화를 여는 에드긴과 홀가의 감옥 장면과 짝을 이루면서

빌런을 응징하는 데 따르는 통쾌함을 웃음과 함께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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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원작 영화답게 여러 아이템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고 제일 감탄했던 건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여기저기 지팡이”와

그걸 제대로 활용하는 제작진의 재치였다.

캐릭터들이 이 지팡이를 활용해 여러 차례 곤궁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에는 문을 만들 수 없다”는

지팡이 아이템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굉장히 영리하고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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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끊임없이 즐겁게 해주는 영화답게 인상적인 장면도 많은데,

광장에서 사이먼과 소피나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돌멩이로 만든 손과 피부가 벗겨진 듯 섬뜩한 모습의 손이 대결하는 장면도

그중 하나였다.

“게임 속의 게임”이라 할,

네버윈터의 영주가 된 포지가 전임 영주가 잔인하다고 금지시켰던 것을

다시 주최하는 하이선 게임 장면은

다채로운 크리처와 아이템을 보는 재미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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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계속 만들어지는 한

인기 좋은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던전 앤 드래곤>만 같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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