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 누군지 아나? <범죄도시> 주인공 마석도야.”

<범죄도시>

by 윤철희

<범죄도시>를 만들 당시만 해도

강윤성 감독과 주연배우 마동석을 비롯한 제작진은

이 영화가 대성공하면서

대한민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수사 액션물 시리즈가 되리라고는,

마동석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스타 액션배우가 될 뿐 아니라

영화의 몇몇 장면이 인기 좋고 장수하는 인터넷 밈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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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가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실제 범죄행각들을 소재로 삼아

그런 짓들을 저지르는 악당들을 응징하는 것을 보여줘

관객의 속을 후련하게 해 준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일 테지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주인공 캐릭터인 마석도 형사(마동석)의 강렬한 존재감일 것이다.

이 캐릭터의 존재감이 어찌나 큰지,

어느 틈엔가 우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와 캐릭터 자체를

동일한 존재로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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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도는 영화에 등장하고 채 1분도 지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는

인상적인 캐릭터다.

“2004년에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자막이 뜨고

거리에서 악에 받친 두 남자가 칼을 쥐고 맞붙는 순간에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두 남성을 가볍게 제압하는 석도는

한국영화의 주인공 캐릭터 중에서

등장하고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를 확고히 다진 사례일 것이다.

이후, 석도는 영화가 시작되고 채 10분도 지나기 전에

이수파 헐랭이를 무지막지한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키면서

자신이 힘 좋고 싸움 잘하는 형사이자

관객에게 통쾌감을 안겨줄 인물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순전히 그 존재감 하나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4편이 만들어졌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만들어질지 모르는 시리즈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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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범죄도시> 시리즈는 속편에 붙는 숫자의 크기와

작품의 질이 반비례하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과시하는 마동석의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범죄도시>라는 제목만 포스터에 실으면

흥행 성공이 보장되다시피 하는 시리즈를 만드는 제작진이

흥행을 방해할 법한 요소는 제거하거나 비중을 약화시키는 선택을 하는 걸

마냥 비난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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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이 만들어지면서 바뀐

(그중 일부는 시리즈의 질을 저하시키는 데 일조한) 요소는 여러 가지다.

제일 먼저 꼽을 점은 석도 캐릭터가 변했다는 것이다.

1편의 석도는 흠결 하나 찾을 길이 없는 모범형사의 전형이 아니다.

황충식(조재윤)에게서 뒷돈을 받아 챙기고(그 돈을 수사비로 쓰기는 한다)

룸살롱에서 향응을 대접받기도 하는,

현실에 존재하는 게 분명한 “적당히 타락한” 형사다.

(심지어 미성년자에게 술을 권하는

“극악무도한” 짓까지 저지르는 형사이기도 하다!!!)

석도 캐릭터가 저지르는 부정은

관객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눈 감아 줄 수 있는 수준이지만,

혹시라도 그게 속편의 흥행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인지

석도는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떳떳하지 않은 짓은 하지 않는

모범경찰로 거듭나면서 작품이 착해지는 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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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악역 캐릭터의 존재감도 약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 어떤 악역 캐릭터도,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그 어떤 배우도

1편의 장첸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한 윤계상이 보여준 강렬함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2편의 손석구, 3편의 이준혁과 아오키 무네타카, 4편의 김무열과 이동휘 등

속편들에서 악당을 연기한 배우들은

모두 뛰어난 배우들로 영화가 요구하는 몫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만,

“너 내 누군지 아나? 하얼빈 장첸이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소개하는 장첸 앞에서는,

그리고 독기로 똘똘 뭉친 그의 흑룡파 부하들(진선규와 김성규)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영화의 선악구도에서 석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는

석도를 위협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존재로서

균형을 잡아줘야 할 악당들의 존재감이 장첸만 못하다 보니,

결국 제작진은 악당들이 더 극악한 짓을 저지르게 만들고

더 많은 살상을 하게 만드는 쪽을 선택해야 했고

그 결과는 영화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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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 1편의 장점 중에는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다는 점,

서울의 어느 경찰서나 동네의 으슥한 구석에 가면

반드시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되는 생생한 캐릭터였다는 점도 있다.

개성이 대단히 선명한 덕에 속편들에 계속 등장하게 된

장이수(박지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속편들에서 기억에 남는 조연 캐릭터가 장이수 말고 또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3편의 초롱이(고규필)를 제외하면

선뜻 떠오르는 캐릭터가 없다(장이수 캐릭터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이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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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뉴스에서 꾸준히 보게 되는 악독한 범죄를 다루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색출해 체포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겪는 애환도 보여주고 있지만,

속편들이 다루는 그런 내용의 설득력은

1편에서 장첸에게 당한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막내 형사(하준)의 에피소드가 가진 호소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속편들에서 보여주는 그런 모습은

영화를 조립시키는 과정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집어넣은

의무적인 사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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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의 장점으로는 재미있고 웃기는 장면이 많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장이수와 독사(허성태)가 석도의 강압 때문에

억지로 화해하는 장면도 재미있고,

장첸이 공항에서 맞닥뜨린 석도에게 “혼자야?”라고 묻자

석도가 “어, 아직 싱글이야”라고 대답하는 장면도 웃긴다

(이 대사는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1편의 유머들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웃음을 빚어내는데 반해,

속편의 유머들 중에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려고 배치된 것처럼 느껴지는 유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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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는 여러 대사와 밈(meme)을 유행시켰다.

그런데 그중에서 “진실의 방”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용의자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거나 딴청을 피울 때 데려가는,

CCTV의 사각지대에 있는 “진실의 방”은

범죄자들이 저지른 극악한 짓을 본 관객이라면

범죄자를 그곳에 데려가는 석도 일행을 절로 응원하게 되는 공간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추격자>에서 김윤석이 형사실에서 하정우를 두들겨 패는 걸 알게 된 형사들이

김윤석을 말리지 않고 잠자코 복도에서 기다려만 주던 장면을

볼 때와 같은 심정을 품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런데 관객의 성원을 이끌어내고 웃음과 통쾌함을 안겨주는 “진실의 방”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따르면서

범죄자라 할지라도 인권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믿는

법치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고문이 자행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내가, 당신이 범죄자를 추궁해 자백을 받거나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

석도 일행의 입장이라면 용의자나 공범을 “진실의 방”으로 데려가려 할까,

아니면 그의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진실의 방”을 없애려 할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시민 입장에서

“진실의 방”은 생각하면 할수록 깊이 고민하게 되는 설정이다.


<범죄도시> 1편은 액션을 중심으로 악당을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오락영화이지만

이렇게 깊은 고민조차 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였다.

그렇게 잘 만든 영화가

석도에게 악당들을 때려눕힐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경직된 듯한,

영화를 흥행시키는 공식에 맞춰 판에 박힌 전개를 보여주는

속편들을 양산해 내는 시리즈로 변질된 건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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