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2006년 영화 <타인의 삶>의 주인공은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국가 동독의 방첩기관 슈타지에 소속된
기관원 비즐러(울리히 뮈헤)다.
비즐러는 공산당과 체제에 충성한다는 일념으로
고문과 도청 같은 비인간적인 짓도 서슴지 않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는 비즐러가 신입 기관원들에게
반체제 세력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심문하는 내용을 들려주며
심문 방법을 가르치는 강의로 시작된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는
비즐러가 드라이만(제바스티안 코흐)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걸 엿본
이웃집 여성의 아픈 지점을 정확하게 집어내
효율적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 그대로 “독일 병정”인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사생활을 성실하게 도청하는 동안 크게 달라진다
이 변화는 관객 입장에서 보면 “개과천선”이고
체제 입장에서 보면 “변절”이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던 냉철하던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도청하던 (체제에 반감을 품은) 대상자를 지키려고
체제를 배신하는 행위를 하기에 이른 걸까?
비즐러가 지휘하는 감시 활동에 의해
집안에서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드라이만은
공산주의체제에 비판적이지만
동독 국내만이 아니라 서독에서도 명망이 높은 까닭에
정권 입장에서 만만하게 건드리기는 힘든 극작가다.
그의 작품 철학은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인데,
영화에 묘사된 비즐러의 변화를 보면
그는 작품이 아닌 생활만으로도 비즐러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도청하다 변화한 계기는 예술에 감화된 것,
그리고 여배우를 향해 개인적인 팬심을 품게 된 것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 도청에 착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당과 체제에 충성하는 것 말고는 다른 즐길 거리를 갖지 못하는,
이웃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자 이웃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는 매춘부를 집으로 불러 성욕을 해소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만
그런다고 그의 외로움이 완전히 떨쳐지는 건 아니다.
비즐러는 “도청”을 통해 접하게 된 인간적 온기를 통해
외로움을 이겨내려 시도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연인인 질란트(마르티나 게덱)에게
흑심을 품은 장관(토마스 티에메)을 위한 도청 작업을 개시하기에 앞서
드라이만이 집필하고 질란트가 주연을 맡은 연극을 감상하러 갔다가
질란트에게 매료된다.
술집에서 질란트에게 팬심을 고백하며 응원하는 비즐러는
피의자를 매섭게 심문하는 비즐러하고는 생판 다른 사람이다
(이때 비즐러가 질란트에게 하는
“저는 당신의 관객입니다”라는 중의적인 대사는 절묘하다).
자신과 연인의 안위를 들먹이는 장관의 위협에 굴복한
질란트의 처지가 안타까운 비즐러는
자신이 감상하는 “도청대상자의 일상생활”이라는 드라마에 심취하면서
그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기에 이른다.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쳐온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으며 감동하는 비즐러의 모습은
그가 드라이만의 입장이 돼서 예술을 감상하기에 이르렀다는 걸,
그 감정이입을 통해 질란트를 사랑하는 연인의 처지에 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브레히트가 동독 체제에 충성하며 온갖 혜택을 누린 극작가라는 걸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설정이다).
그의 감정이입은 체제에 봉사하며 누려온
안정적인 생활이 위태로워질 게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드라이만과 질란트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연모하던 질란트가 애처로운 최후를 맞으며 남긴,
진짜 연인인 드라이만은 듣지 못하는 마지막 말을 듣게 된다.
<타인의 삶>은 “도청”이라는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던 중에
뜻하지 않게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하게 된 인물을 다루는
미시적 차원의 영화인 동시에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통해 연명하는 체제를 비판하는
거시적 차원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자막은
1980년대에 동독에서
“10만 명의 감청요원과 20만 명의 스파이가 정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고 소개한다.
1990년대 초에 서독과 통일할 당시 동독 인구가 1,600만 명이었으니,
당시 동독인 50명 중 1명은 나머지 49명을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던 셈이 된다.
이런 나라가 과연 생산적인 나라일까?
내 주위에 있는 50명 중에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적어도 1명은 있다는 걸 알면서 살아가는 삶은 행복할까?
영화에는 슈타지가 작가들이 쓰는 타자기 종류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심지어 어느 작가는 손 글씨로 원고를 쓰고는
나중에 그걸 타자기로 옮겨 치는 스타일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말로 쓸데없는 일에 쓸데없이 효율적인 체제에 발전의 여지라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체제에서는
장관과 그루비츠(울리히 투쿠르)처럼 권력의 정점에 가까이 있는
일부 무리만이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영화에는 동독 체제가 무너진 이후의 씁쓸한 후일담과 흐뭇한 이야기가 모두 등장한다.
“장관”이라는 완장을 이용해 여배우를 농락하며
예술가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던 자가
체제가 몰락한 후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주저 없이 속내를 내뱉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씁쓸하다.
반면, 자신을 감시한 이의 희생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드라이만이
비즐러에게 헌정한 책을 비즐러가 구입하는 부분에서는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즐러와 그루비츠가 슈타지 구내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모르고
공산당 서기장에 대한 농담을 하려던 말단 요원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다문다.
그루비츠는 허허 웃으며 괜찮으니까 하려던 농담을 하라고
말단 요원을 부추기고는 자기도 비슷한 농담을 한다.
이후 말단 요원은 하찮은 업무로 좌천된다(나중에는 비즐러도 그의 동료가 된다).
그렇지만 비슷한 농담을 했던 그루비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힘없는 자가 체제를 조롱하는 농담을 하면 좌천과 전락이라는 결과가 따르지만,
권력이라는 칼자루를 쥔 자가 농담을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로남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이 글을 쓰려고 다시 본 <타인의 삶>은
처음 개봉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영화에 등장하는 감청기술은 1980년대에만 해도 첨단기술이었지만,
지금 보면 품이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기술이다.
사람이 24시간 교대하며 감시대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도 고된 작업이고
녹취한 내용을 보관하고 검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비즐러처럼 감시하며 얻은 내용을 (일부러 또는 실수로) 왜곡하거나 하면
감시 작업에 허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주위에 펼쳐지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어떨까?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초소형인 카메라와 녹음기가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녹화·녹음하고
인공지능이 그 내용을 녹취한 후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건 지금 당장도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한두 걸음만 더 내딛으면 바야흐로 빅 브라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타인의 삶>의 배경인 동독과 비슷한 체제를 살았었다.
그런 야만적인 시대를 벗어나려 노력한 끝에
정치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뤄낸 우리 눈앞에는
그때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인권을 유린할 수도 있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빅 브라더의 등장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