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술 하는 당나라 시대 셜록 홈스 이야기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by 윤철희

서극(徐克, Tsui Hark) 감독이 연출한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이하 <적인걸>)의

주인공 캐릭터 적인걸(狄仁傑, 디렌지에, DíRénJié, 630~700)은

당나라 때 재상을 역임했던 실존인물이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황제에게는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충신으로 이름이 높지만

범죄를 수사하는 탐정 활동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인물의 이름 앞에

오늘날 “귀신(神)처럼 뛰어난 탐정”이라는 의미로

“신탐(神探)”이라는 형용어가 붙은 건

모두 네덜란드 외교관이자 소설가인

로베르트 한스 반 훌릭(Robert Hans van Gulik, 1910~1967) 덕분이다.

반 훌릭은 적인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가는

탐정소설 “디(Dee) 공(公)” 시리즈를 네 편 집필해

적인걸 캐릭터의 매력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시리즈 중 한 편은 남편을 살해하고는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하는

아내들 이야기를 다루는데,

사람들이 타살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살인방법이 무척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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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훌릭이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빚어낸 “적인걸”의 탐정 캐릭터 버전은

2000년대 초반 중국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신탐 적인걸>을 통해

영상의 세계로 진출하며 인기를 얻게 됐고,

결국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주도한 서극을 통해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최가박당>, <영웅본색>, <천녀유혼>, <황비홍>, <동방불패> 등

코미디와 액션, 무협, SF 같은 각종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뛰어난 작품들을 제작하거나 연출했던 서극은

<적인걸>에서도 그의 장기인,

상상 가능한 온갖 요소를 다 동원해 비빔밥처럼 비벼대는 전략을 취한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적인걸>이라는 비빔밥은

보기에도 근사하고 맛도 굉장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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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는 것으로

<적인걸>에 묘사된 세계가 순전히 상상력에 의해서만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는

인상을 관객에게 심어준다.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며

세계 각지의 문화가 어우러지던 당나라 시대라는 <적인걸>의 시간적 배경은

서극이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걸 수월하게 해 준다.

그 덕에 <적인걸>은 서양에서 온 외교사절과 기독교 성당처럼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을 법한

이색적이고 아기자기하며 알록달록한 비주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더불어 서극은

“측천무후가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적인걸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작품의 뼈대로 삼으면서 허황된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 <적인걸>에

적절한 정도의 사실적 분위기를 가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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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렇게 역사적 사실에 발을 굳게 딛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긴 서극은

그 바탕 위에 온갖 장르에서 끌어온 요소들을 마구 뒤섞는다.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체를 추적해 나간 끝에 진상에 다다르는 탐정물,

<소오강호>와 <동방불패>처럼 경공을 써서 공간을 종횡하는 캐릭터들이

칼과 각종 무기로 맞붙어 싸우는 무협물,

대불 안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로 상징되는 스팀펑크,

상대방이 쓰는 무기의 빈틈을 찾아내 박살 내버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소재로 만든 적인걸의 무기 항룡간과

서역에서 가져온 “벌레(蠱)”의 독을 섭취한 자가

햇볕을 쪼일 경우 일어나는 자연 발화 현상과

얼굴을 바꾸는 변신술 등의 판타지,

적인걸을 유혹하려는 정아(이빙빙)의 시도를 통해 재연된,

<천녀유혼>의 왕조현과 <동방불패>의 임청하가 보여줬던

약한 정도의 에로티시즘이 <적인걸>이라는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짬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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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은 이렇게 온갖 요소를 뒤섞는 와중에도

적인걸 캐릭터를 “당나라 시대에 활동하는 한 무술 하는 셜록 홈스”로 묘사하겠다는

방침만큼은 일관되게 유지한다.

적인걸(유덕화)과 측천무후(유가령)가 밤중에 궁궐에서 만날 때

측천무후의 옷차림을 보라.

당나라 시대의 복장이라기보다는

19세기말 빅토리아시대 서구 여성의 의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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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적인걸이 이끄는 수사진이 행하는 탐정 활동의 수준은

“신탐”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만큼 탁월하고 치밀하지는 않다.

서극은 그런 사실이 드러날라치면

다른 장르의 요소들을 내세워 관객을 현혹시키는 빼어난 솜씨로

위험한 순간을 모면해 나가고,

그러면서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자연 발화 현상과 국사(國師)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슴 같은

허무맹랑한 요소들의 비밀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준 수사물을 봤다고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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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걸>에는 무협 액션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서극의 연출작답게 인상적인 장면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적인걸이 대불 안에서

대불을 쓰러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사타충(양가휘) 패거리와 대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황비홍>의 창고 장면에서 정점을 찍었던,

넓은 공간에 배치된 각종 소품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공간 내부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면서

상대에게 가하는 공격과 그걸 막는 방어를

적절한 카메라워크로 포착하고 리듬감 있는 편집을 통해

속도감과 타격감과 아찔함과 짜릿함을 극대화하는

서극 특유의 액션 연출 솜씨가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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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걸>이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면서

적인걸은 (홍콩을 아우르는) 중국 영화계의 인기 캐릭터가 됐고,

이후로 10편 가까운 속편이 만들어지는 시리즈가 됐다.

물론, (서극이 3편까지 메가폰을 쥐었던) 시리즈는

속편이 만들어질수록 점점 더 억지스럽고 엉망인 내러티브와

CG로 점철된 싼 티 나는 비주얼을 남발하는

그저 그런 작품들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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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걸>의 결말에는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대불이 쓰러지고 난장판이 된 궁궐에서 측천무후를 구한 적인걸은

부정하기 힘든 정치적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측천무후를 황제로 인정하고는 조정을 떠난다.

재기 넘치는 영화감독으로 주목받던 서극이

중국 정부를 (또는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장진호>(2021) 같은 프로파간다영화를 만들게 된 행보와 묘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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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걸>은 “동양의 스필버그”라고도 불렸던 뛰어난 감독 서극의

아마도 마지막 수작(秀作)일 것이다.

측천무후를 구하는 크나큰 공을 세우고도

“벌레(蠱)”의 독에 중독돼 지하도시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따사로운 햇빛을 즐길 수 있는 양지를 그리워하는 듯

촉촉한 눈빛의 적인걸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적인걸의 그 모습이

서극이 지금 처한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 모습은 아닐까 하며 떠올린 생각이

온전히 내 상상의 산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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