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
평소에도 얄밉다고 느껴지기 직전까지 주위사람들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 그레이스에게
이 일은 정말로 기분 좋게 이사칠을 놀리는 놀림감이 됐다.
그레이스는 앞으로도 툭하면
“다 큰 어른이 어린애처럼 야구공 크기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사칠을 놀릴 작정이었다.
이사칠은 다시 놀림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핑계를 대려 했는데,
지상에서처럼 눈에 티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거라는 핑계는 댈 수가 없었다.
공중을 떠다니는 불순물 때문에 생길지 모를 사고를 방지한다는 등의 이유로
공기 정화를 단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는 우주정거장에서
눈에 티가 들어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이사칠은 다른 핑계거리를 떠올렸다.
몸이 그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수분을 배출했다는 거였다.
이사칠 일행은 지상에서 훈련받을 때
“우주에 가면 오줌을 자주 누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주에서는 혈액이 지상에서보다 몸 곳곳으로 훨씬 잘 퍼지는데,
그럴 경우 체내에 수분이 너무 많다고 착각한 몸이
체내 수분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수분을 배출하려 하기 때문에
소변을 자주 보게 될 거라는 거였다.
당시 강사는 이런 식의 수분 배출이 심해질 경우
탈수 증상으로 이어지면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었다.
그레이스는 이사칠이 내놓는 어설픈 핑계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에이, 그건 오줌 얘기잖아요. 아무렴 눈물도 그렇게 흘릴까?
한국 보니까 한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 거잖아요?
저번 처럼요? 그렇죠? 아니, 그렇게 한국이 가고 싶어요?”
화제를 돌릴 필요를 느낀 이사칠의 눈에
많은 작품에서 공연하며 뻔질나게 섞었던 그레이스의 알몸이 들어왔다.
그레이스를 처음 접한 팬들이 저글링 묘기 다음으로 인상적인 점으로 꼽는
그레이스의 새하얀 알몸은
바로 옆에 있는 버지니아가 입은 짙은 색 스킨수트와 극명하게 대비됐다.
이사칠은 옷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사칠은 버지니아 쪽으로 고갯짓하며 말했다.
“나랑 에밀리는 몰라도 너랑 버지니아는 꼭 입어야 한다고 그랬잖아?”
이사칠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를 단박에 알아차린 그레이스는
버지니아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너무 갑갑해요, 저거 입으면. 난 이게 편해요.”
지상에서도 틈만 나면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어젖히는 그녀로서는
당연히 내놓을 법한 대답이었다.
“버지니아라고 갑갑하지 않아서 저러겠니? 저걸 입어야...”
그레이스는 이사칠의 잔소리를 막으려고 버지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를 띄워두고 자세를 잡으려 애쓰는 버지니아를 본 그레이스는
피식 웃더니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줘서는 버지니아에게로 날아갔다.
대뜸 버지니아의 두 다리를 잡은 그녀는
버지니아의 사타구니가 카메라에 제대로 잡히도록
버지니아의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이런 자세여야 된다니까.”
그러고는 흘러내려 얼굴을 가린 버지니아의 긴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쓸어 넘겨
얼굴 전체가 카메라에 드러나게 해줬다.
“팬들은 우리가 진짜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해.
카메라 앞에서 하나도 숨김없이 모든 걸 다 보여주기를 원해.
그런데 촬영할 때는 카메라를 의식해야 하지만,
네가 파트너랑 진짜로 뿅 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카메라가 있다는 걸 잊게 될 거야.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좋다는 걸 명심하면 돼. 알았지?”
“네, 언니.”
데뷔를 앞둔 버지니아는
이 바닥의 베테랑인 그레이스의 지도에 따라
얼굴과 은밀한 부위들이 항상 카메라에 다 포착되도록 자세를 잡는 연습을 했다.
일반인이라면 불편해서라도 취하지 않거나 오래 취하지 않을 자세이지만
작품을 찍을 때는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자세를.
“자, 자세는 이렇게 계속 연습하도록 하고...
버지니아, 우주정거장에 있는 우리가 갑갑한데도
이걸 입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보려무나.”
자세 연습을 중단하고 두 사람에게로 몸을 돌린 버지니아는
똑 부러진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체형만큼이나 시원시원하게 설명했다.
“우선, 우주공간에는 태양에서 날아오는 방사선하고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기 힘든 우주선(宇宙線)이 많이 날아다녀요.
우리 몸에 이런저런 해를 끼치는 이것들은
지구의 자기장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안 되지만,
자기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주에서는
이것들로부터 받을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 스킨수트를 입을 필요가 있어요.”
“그거 말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잖아. 그걸 설명해야지.”
그레이스는 짓궂은 말투로 재촉했다.
1년 넘게 그레이스를 겪은 터라
그레이스가 원하는 설명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버지니아는
색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씨익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구보다 중력이 낮은 곳에서 장기간 생활하면
지구에 있을 때보다 근육을 쓸 일이 적기 때문에
근육이 약해지고 지상에서보다 충격을 덜 받는 뼈도 밀도가 떨어지게 돼요.
몸 안팎의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몸도 약해지고요.
우리 몸의 뼈를 지탱하는 근육이 약해지니까,
그리고 뼈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척추의 뼈와 뼈 사이에 있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키가 커지기도 해요.”
그레이스는 원하는 대목이 등장하자 환해진 얼굴로 버지니아의 말을 끊었다.
“어머, 그렇구나. 얘, 그러면 존슨(Johnson)도 키가 커지는 거니?
딕(Dick)도 키가 커지는 거고?
아, 오빠가 잘 알겠다. 어때요? 커졌어요?”
이사칠은 두 사람에게 야릇한 상상에 젖을 짬을 잠시 주고는 입을 열었다.
“자꾸 엉뚱한 쪽으로 얘기 돌리지마, 그레이스.
버지니아가 한 설명에서 중요한 건
스킨수트를 입어야만 신체기능이 약화되는 걸 막고
척추에 무리가 가는 걸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야.
답답하다고 저걸 입지 않으면,
운동을 꾸준히 해서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지구에 돌아갔을 때 적응하기 힘들어질 거야.
작품 활동을 하는 것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평상시 생활도 힘들어질 거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훈련을 같이 받은 그레이스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
“버지니아 얘야 야심이 큰 애니까,
거기다가 오빠 말마따나,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이 바닥의 슈퍼스타가 될 재목이고
앞날이 창창한 애니까 당연히 입어야죠.
지구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은 애니까.
그렇지만 얘에 비하면 나야 뭐...”
“네 앞날도 짧은 게 아니잖아?
지구로 돌아가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너도 잘 알잖아?
힘든 훈련 다 거치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여기 온 것도
그런 대접을 받을 거라고 예상해서 그런 거잖아?”
그레이스는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얘, 너,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남자 조심해야 한다.
성공하고 나서도 조심해야 하고.
아무튼 항상 조심해야 돼, 사내놈들은.”
그레이스가 기죽은 목소리로 남자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지구에 두고 온 남자친구 케빈은 여전히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남자가 많았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금세 사랑에 빠졌고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가진 걸 몽땅 내줄 정도로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러면 남자들은 단물을 빨아먹을 대로 다 빨아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이사칠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이용해먹고
그녀에게 기생하려는 건달이거나 사기꾼이었다.
“그녀가 아닌 그녀의 돈을 사랑하면서 덤으로 그녀의 몸도 탐하는 놈들”로
영 탐탁치가 않은 놈들이었다.
연락이 두절된 케빈도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놈들과,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많은 놈들과 똑같은 놈일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