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247> ★ 04 ★
이사칠은 우주왕복선이 발사되기 전날에도 케빈과 영상통화를 하다
“1달 전에 산 낡은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길바닥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한참을 고생했다는 케빈이 불쌍하다며
온라인으로 슈퍼카를 구매해 선물하려는 그레이스를 말렸었다.
그러나 이사칠의 만류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것이므로 조언만 해주는 선에서 멈춰야한다는 게,
자신에게는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게,
남들 인생에 과한 관심을 가져봐야 이사칠 자신의 혈압만 높아질 뿐이라는 게
업계에서 그레이스와 비슷하거나
그레이스보다 더한 사람들을 겪을 만큼 겪은 끝에 도달한 이사칠의 신조였다.
그래서 이사칠은 우주에 오자마자 슈퍼카 사이트에 접속해
케빈에게 줄 슈퍼카를 결제해주는 그레이스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우주로 떠난 포르노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기사화하는 언론이
“포르노배우 그레이스 오가 우주에서 슈퍼카를 구매한 최초의 인간”이 됐다는 기사를
앞 다퉈 써낸 덕에 뜻밖의 홍보 효과를 얻은 지금,
우주여행을 기획한 이사칠 입장에서는
그녀의 무분별한 애정행각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찌 보면 적절한 처신이었다.
남들은 케빈이 슈퍼카를 받아낸 김에 그레이스 곁에서 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케빈이 슈퍼카를 몰고 바람을 쐬러 갔다가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지역에 가는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는 거라며
한사코 케빈을 두둔했다.
하지만 자신이 케빈을 옹호하며 내뱉는 그런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는 것은
그레이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너 같이 야무진 애한테 이런 얘기가 뭐가 필요하겠니.
얘기 안 해도 알아서 잘 할 텐데.”
목구멍을 넘어오는 데 간신히 성공한 목소리로 버지니아에게 말한 그레이스는
여전히 허공에서 덜덜거리고 있는 딜도들을 챙기러 몸을 날리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나라는 년은 남자 복이 왜 이렇게 없는 건지, 원.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그렇게 많은 놈을 만나는 데도
번번이 이런 놈들만 만나는 건지.”
이사칠은 중요한 작업을 앞두고 분위기가 쳐지는 걸 원치 않았다.
때마침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스마트워치를 확인한 이사칠은 못을 박듯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 복 타령은 지구에 돌아가서 하고, 빨리 옷 입고 와.
10분 뒤에 리허설하자.
이번 작품 성공하면 네 앞길이 무진장 길어지고 편해질 거라는 거, 잘 알지?
그때를 위해서라도 스킨수트 꼭 챙겨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알아.”
그레이스는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이사칠의 잔소리가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았다.
그녀는 딜도들을 챙겨 일일이 전원을 끈 다음에
작은 벽장 크기인 자기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옷이 너무 끼어 다리가 잘 안 들어간다고 투덜거리면서
주섬주섬 스킨수트를 입었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 공개할 보너스 영상에 활용하기 위해
훈련 준비 단계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과 리허설 장면을 녹화해온 이사칠은
카메라를 챙기러 가다 벽 쪽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눈물구름들을 만났다.
이곳의 구름들이 정처 없이 선내를 떠다니는 일은 없었다.
이사칠은 구름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알았다.
구름들의 목적지는 우주정거장 전체에 촘촘히 설치된 정화시스템이었다.
우주정거장은 지상에서 보급 받는 것 말고는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지상에서 보급을 받는 건 쉬운 일도,
자주 있는 일도, 비용이 적게 드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우주정거장에서는 선내에 존재하는 자원을 최대한 재활용하며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우주정거장은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폐쇄 순환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인 물은
비가 내리지도 않고 샘물이 솟아나지도 않는 곳인 우주에서는
도무지 얻을 길이 없는 귀중한 자원이다.
지독히도 귀중한 자원이라,
지상에서처럼 물을 펑펑 써가며 샤워하는 건 우주정거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상에서처럼 샤워기를 통해 물이 아래로 똑바로 쏟아지게 만들 수가 없는 여건 때문에,
그리고 샤워에 쓴 물을 회수가기 어렵다는 여건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물이 대단히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제대로 된 샤워나 목욕을 못하고 물티슈로 몸을 닦아내는 것에 그쳐야 하는
우주정거장에는 사람들이 뿜어낸 체취가 진동을 한다.
지상에서처럼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들여 환기시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곳인 우주정거장에는
체취 말고도 우주정거장이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오랫동안 쌓인 터라
뭐라 형언하기 힘든 냄새도 진동하는데,
그 결과 우주정거장의 생활을 카메라를 통해서만 보는
지상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냄새가 우주인들의 코를 괴롭힌다.
아무튼 이곳의 물은 그토록 귀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회수돼 사용된다.
우주인이 내뱉는 숨결 속의 습기와 배설하는 땀과 오줌은
단 한 방울도 빼놓지 않고 철저히 회수된다.
그러고는 섭취자의 신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불순물을 철저히 걸러내고 남은 깨끗한 수분이
우주인들에게 생활용수로 제공되고,
일부 분량은 전기 분해해서 산소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선실 벽에 설치된 정화시스템으로 끌려가는 눈물구슬을 쫓는 이사칠의 눈에
옆 선실에 있는 에밀리 박(Emily Park)이 들어왔다.
이사칠이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에밀리는 팔을 뻗어 허공에 떠있는 안경을 잡았다.
우주에 온 이후로 내내 눈을 혹사한 터라 잠시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 듯했다.
이사칠은 안경을 벗은 에밀리의 모습과 안경을 쓴 에밀리의 모습을 다 좋아했다.
안경을 쓴 에밀리는 의사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안경을 벗은 에밀리는 청순한 매력을 순수한 샘물처럼 뿜어냈다.
이사칠의 눈에는 두 얼굴 다 말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밤하늘의 별처럼 총기(聰氣)가 반짝거리는 에밀리의 눈이 모니터에 꽂히면서
안경에 모니터가 작게 반사됐다.
모니터에 뜬 지상의 관계자들과 갖는 원격회의에 몰두한 그녀는
콩알만 한 센서를 모니터 앞으로 들어 올리고는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오가는 얘기가 작게 들렸는데,
아마도 몇 시간 전에 이사칠 일행의 몸에 부착했던 센서들이 내놓은 값이
터무니없는 수치인 걸 보면
센서에 입력된 초기 설정값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 같았다.
옆에 떠있는 태블릿을 잡아 조작하려다 전자펜을 놓친 에밀리가 펜을 잡으려 몸을 돌렸다.
그러던 중에 에밀리의 시선과 이사칠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밀리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역시 사랑스러운 눈빛을 이사칠에게 돌려줬다.
“제대로 된 우리 사랑은 이제부터야.”
에밀리의 눈빛에 가슴이 벅차오른 이사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곧바로 작업 모드로 돌아간 그녀는
펜을 잡고는 고개를 돌려 지상의 관계자들과 하던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