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 ★
“당신 작품을 많이 봤습니다.
이성애자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맥스 윌리엄스(Max Williams)는 주위에 둘러앉은 제작진을 슬며시 둘러보며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오해해도 할 수 없지, 뭐.
아무튼 그러면서 당신 팬이 됐죠.
뭐랄까, 당신의 퍼포먼스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달까...
상대 배우를 진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게 이유인 것 같아요.
언제 기회가 되면 직접 만나 그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게도 이렇게 화상으로밖에는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됐군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얘기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맥스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긴, 그러니 세계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가 되지 않았겠나.
이사칠이 공개된 자리에서 팬이라고 밝히는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대놓고 그렇다는 얘기를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얘기를 듣고 흐뭇해진 이사칠은 황송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세계적인 토크쇼 진행자가 팬이시라니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이죠.
이 자리가 좋은 인터뷰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우주는 어떤가요?”
맥스의 표정에는 궁금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현창 밖을 바라본 이사칠은
생방송 준비에 바빠 한동안 현창 밖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모르고 외면하는 사이에 한반도가 현창을 몇 번이나 지나쳤을지 궁금했다.
“까맣습니다.
지구나 태양이나 별들이 있는 곳을 뺀 나머지 공간은 그냥 시커멓게만 보입니다.
먹물이나 밤바다랑 비교하면 될까요?
지상에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맣습니다.
너무너무 조용하고요.
우주정거장 선체에서 나는 기계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지구에서는 알게 모르게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하고 있습니다.”
맥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마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내려 썼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 행동은
그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한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맥스가 태블릿의 자료 파일을 열자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모두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이사칠은 그들이 있는 공간을 보면서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인 자료들과
사방에 널브러진 비주얼 이미지 같은 것들은
그들이 있는 곳이 동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 쓰던 작업공간도,
여성의 노골적인 육체에만 집중하는 이미지가 널려있다는 점만 달랐을 뿐,
그곳과 대단히 비슷했었다.
“이제 다시는 저런 분위기를 경험할 수 없겠지?”
이사칠의 머릿속에 그곳을 향한 그리움이 물씬 밴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반년 넘은 기간 동안은
여기 이곳처럼 금속성 분위기의 삭막한 공간에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그 후에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환경에서
죽을 때까지 생활해야 할 거라 생각하니
그의 심중에서는 벌써부터 화면 속의 공간을 향한 그리움이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었다.
이사칠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책상에 놓인 태블릿을 조작하는 것과는 달리
허공에 뜬 태블릿을 조작하는 이사칠의 눈에
맥스의 옆옆 자리에 앉은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이사칠 일행의 화성행이 정해진 1년 전부터 비밀리에 인터뷰를 섭외하고
여러 차례 화상회의를 통해 의견을 조율한 방송작가 데이브(Dave)였다.
“〈스페이스 너바나(Space Nirvana)〉!!!”
맥스가 자료를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생방송의 제목 〈스페이스 너바나〉는
화성행을 꿈꾸기 시작할 때부터 이사칠의 머릿속에 이미 정해져있었지만,
이사칠이 그걸 데이브에게 알려준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생방송은 〈우주 생방송〉이라는 가제로만 불렸었다.
“끝내주는 제목이네요. 제목만 들어도 엄청나게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이번 방송에 품은 야심이 어느 정도이고
이번 방송으로 이루려는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군요.”
맥스는 고개를 들어 이사칠을 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 방송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다는 건 잘 아시죠?
당신을 비난하면서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 거고요.
그런데요, 그런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이 준비하는 〈스페이스 너바나〉가
인류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인 퍼포먼스이자 콘텐츠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응원해주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칠이 인사하는 동안 그의 옆에서 비닐 팩이 슬그머니 떠올라 화면으로 들어왔다.
“그거, 커피인가요?”
맥스의 물음에 이사칠은 옆을 돌아봤다.
카페인 중독인 그는 틈만 나면 커피를 들이켰는데,
조금 전에 마시다 놔두고는 깜빡 잊은 커피가
실내를 떠돌다 화면에 들어온 거였다.
“맞습니다, 커피.”
“우주에서는 그렇게 커피를 마시는군요. 잠깐...
우주인들이 공중에 떠있는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이사칠은 맥스가 말하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았다.
이사칠 일행도 이곳에 온 직후에 신기해서 몇 번 해보다
결국에는 흥미를 잃고 중단한 짓이었다.
맥스의 기억을 돕기로 마음먹은 이사칠이 커피 팩을 쥐고 손에 살짝 힘을 주자
팩에 달린 특수 빨대를 통해 한 모금 분량의 커피가 흘러나왔다.
이사칠은 탁구공만 한 시커먼 구슬이 꿀렁거리며 허공을 유영하게 만들고는
제작진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들 지상에서는 접하지 못할 신기한 광경을 즐기는 기색이었다.
“회의를 계속 해야겠죠?”
이사칠은 입을 벌리고 구슬에 달려들어 검은 구슬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볼을 두세 번 볼록거린 후 커피를 삼켰다.
제작진 몇 명이 엉겁결에 박수를 쳤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커피 마시는 데 쓰는 특수한 컵도 있지 않나요?”
큼지막한 덩치에 어울리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낸 맥스가 물었다.
이사칠은 맥스가 흔히들 스페이스 컵(space cup)이라고 부르는
“제로-G(0G) 컵”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우주에서는 커피도 지상에서하고는 다르게 운동한다.
우주에서는 커피가 컵의 벽에 달라붙기 때문에
커피 잔을 뒤집더라도 잔 밖으로 커피가 쏟아지는 일이 없다.
그래서 우주에서 커피를 컵에 담아 마시려면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생긴 컵을 사용해야 한다.
잔을 기울였을 때 커피가 입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게 해주는 공학이 적용된 컵이다.
그렇지만 이사칠은 그 컵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우주정거장에 보급한 특수 커피 팩을 특수 커피머신에 넣고
뜨거운 물을 팩에 주입한 후 특수 빨대를 통해 빨아 마셨다.
맥스가 무심결에 머그잔을 기울여 커피를 홀짝인 후 생각난 게 있다는 투로 물었다.
“커피 맛은 어떤가요?”
“솔직히 말하면 지구에서 먹던 맛은 아닙니다.
원두가 다르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닐 거고,
여기서 느끼는 미각과 후각이 지상에서하고는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맥스는 이사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야 봤는데, 그게 ‘MS’ 로고인가요?”
이사칠이 입은 스킨수트의 왼쪽 가슴에는
M과 S가 뒤얽힌 디자인의 로고가,
솔직히 말해 촌스럽기 그지없는 로고가 달려있었다.
초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낸 로고처럼 보였다.
아무튼 이 로고를 구성하는 M과 S는
“화성 정착자들”이라는 뜻의 “Mars Settlers”의 약자로,
“MS”는 화성에 정착할 지구인을 보내는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
“맞습니다.”
“로고도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지만, 프로젝트 이름도 참 멋대가리 없지 않나요?
도대체 누가 그렇게 무성의한 이름을 지은 건지...
그래도 역사에 남을 이름인데 고민 좀 해서 그럴싸하게 지을 것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맥스는 화제를 돌려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맥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낭랑했지만
어조는 조금 전과는 달리 제법 진지했다.
“〈스페이스 너바나〉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방송까지 4일 남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미국시간으로 이번 주 금요일 밤에 방송이니까요.”
“이번 주말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야릇한 상상을 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나겠군요.”
맥스는 몸 앞에서 가볍게 쥔 주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키득거렸다.
“그런 점을 감안해 날짜를 잡은 거니까요.”
“우리 인터뷰가 월요일로 잡힌 건 아실 거고...”
맥스가 농담을 하는 동안 무의식중에 이마에 올려놓았던 안경을 내려
태블릿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문서에도 있지만, 다시 확인해야겠네요.
〈스페이스 너바나〉 생방송이 실패할 경우,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안타깝지만 저희 인터뷰는 취소될 겁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목숨 걸고 우주로 나가 인류 최초의 퍼포먼스를 시도한
위대한 아티스트의 진실한 얘기를 듣는 것’이 우리 토크쇼가 추구하는 목표인데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데이브한테서 얘기는 들으셨죠?”
“맥스 윌리엄스 쇼” 제작진 입장에서 이사칠 인터뷰는
맛있게 먹자니 귀찮은 일이 많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굉장히 아까운 닭갈비 같은 거였다.
전 세계의 몇 억 명이 시청할 것으로 예상되는 콘텐츠의 연출자이자 출연자는
세계에서 제일 인기 좋은 토크쇼 제작진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셔야 할 초대 손님이었지만,
그 게스트가 MS 프로젝트 멤버로 선정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포르노배우라면 얘기는 생판 달랐다.
이사칠을 게스트로 모시면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대단한 시청률을 올릴 테지만
방송 이후에 불어 닥칠 후폭풍도 어마어마할 터였다.
인기를 얻으려면 항의와 비난도 감수해야 할 터였는데,
문제는 항의와 비난이 뒤섞인 폭풍의 강도가
너끈히 감당이 가능한 정도일지 여부를 누구도 예측 못한다는 거였다.
자칫하다가는 맥스와 토크쇼의 위상이 회복 불능의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인터뷰 날짜가 〈너바나〉 방송 이후로 잡힌 건,
그리고 인터뷰에 대한 사전 홍보를 전혀 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방송 전에 인터뷰를 내보내면 토크쇼 분야 세계 시청률 1위인 방송이 포르노 방송을,
그것도 계정당 최소 15달러의 시청료를 받는 유료방송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줬다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래서 방송이 끝난 다음에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생방송이 실패했을 때가 문제였다.
실패하고 만 생방송의 책임자와 하는 인터뷰에 관심을 가질 시청자가 있을 리 만무하고,
그러니 인터뷰 자체도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비밀리에 진행한 인터뷰 준비작업 내내 제작진이 일관되게 고수한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