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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칠의 뇌는 방송을 마무리하는 멘트를 하기 한참 전부터
어서 빨리 카페인을 대령하라고 발악했다.
방송 시작 전에 꽤나 많은 카페인을 섭취했는데도
카페인 기운이 그새 다 떨어졌다며 발버둥치는 몸뚱어리 안에서
카페인을 대하는 이사칠의 마음은 다시금 이성과 감정으로 분열했다.
이성은 그가 지금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옳은 주장이었고,
앞으로 전망을 생각하면 더더욱 옳은 주장이었다.
우주정거장은 커피 재배지가 아니다.
정성껏 기른 커피나무에서 커피 원두를 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모두 지구에서 가져온 것인데,
지구에서 이곳으로 화물을 수송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이곳 우주인에게는 개인별로 커피의 양이 배정돼있다.
그렇기에 이사칠의 이성은 지금처럼 무턱대고 마셔대다가는
그의 몫으로 배정된 커피가 얼마 안 가 동날 거라고 경고했다.
이사칠의 카페인 중독 성향을 잘 아는 그레이스와 버지니아가
자기들 몫을 아껴서 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에게서 받은 양으로 버틸 기간도 아주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커피를 아껴 마셔야 옳았다.
반면, 그의 감정은 카페인에 대한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면서
체내에 카페인을 더 자주, 더 많이 주입하라고 아우성쳤다.
개인에게 배정된 양이 제한돼있는데 그게 바닥날 시점이 멀지 않았다는 인식은
욕망을 잠재우기는커녕 더더욱 부채질하면서 아우성을 악다구니 수준으로 키워놓았다.
사람의 욕구는, 욕망은 묘한 것이다.
우주정거장에 비축된 커피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반면
커피를 보급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을 의식한 순간부터
이사칠은 커피가 더욱 더 당겼다.
카페인을 더욱 더 간절히 원하게 됐다.
우주정거장 선내에 가득해서 어려움 없이 호흡하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공기보다
다 떨어지더라도 생존에는 큰 지장이 없는 카페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커피 팩이 줄어들면서 커피가 고갈될 거라는 게 가시화할수록
커피를 원하는 욕망은 커져만 가는 악순환이 일어날 텐데,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건 카페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모든 물건과 자원에 다 해당되는 문제였다.
우주정거장에 온 이후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성과 감정이 충돌했을 때
승률이 월등히 높은 건 감정 쪽이었다.
이사칠은 어떻게든 이성이 이기게 만드는 것이 이성적인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이성의 냉철함은 감정의 뜨거운 열기 앞에서 맥없이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승리는 역시 감정의 몫이었는데,
이번에 이성과 감정의 드잡이가 끝났을 때
감정의 손을 들어 승리를 선포하는 심판 역할을 수행한 건 버지니아였다.
버지니아는 특수 머신으로 데운 커피 팩을 들고 기다리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날아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생하셨어요”라고 인사하며
이사칠의 손에 쥐어줬다.
이사칠은 버지니아가 건넨 커피를 곧바로 빨았다.
카페인이 주입되자 방송하는 동안 쌓인 피로 탓에 흐리멍덩했던 시야가 한층 맑아졌다.
이사칠은 자세 연습을 하러 가는 버지니아의 뒤를 또렷해진 눈으로 쫓았다.
이사칠은 선실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고혹적인 표정을 짓는 연습에 열중하는 버지니아를 보면서
“버지니아는 이 바닥에서 대성할 인재”라는 짐작이 옳은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100퍼센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칠은 그녀가 보낸 온라인 지원서를 본 순간부터 대성 가능성을 감지했는데,
놀랍게도 이때 그는 그녀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여성의 실물이나 동영상이나 사진을 보지도 않은 채로
그 여성이 포르노배우로 성공할지 여부를 점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일 텐데,
이사칠이 그녀가
(이때는 그가 그녀에게 “버지니아 스타”라는 예명을 지어주기 전이었으므로 본명으로) 보낸
지원서의 첫 문장을 읽으면서 한 짓이 그거였다.
타당한 근거라는 게 있을 리 없는 그의 예감을 뒷받침한 것은
짧게나마 작은 의류업체를 위해 모델 일을 해본 적이 있다는 문장이었다.
지원서를 읽은 이사칠이 다급하게 한 연락에 따라 잡힌 화상 인터뷰에서
이사칠이 “포르노를 촬영하는 작업은 어떨 것 같으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델 일이랑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델 일이나 포르노 촬영이나 카메라가 있는 위치를 알고
어떻게 하면 카메라에 근사하게 잡히는지를 의식하는 채로 특정한 행동을 하는 건데,
다른 게 있다면 포르노에서는 그 행동이 섹스라는 거겠죠.
이런 작업을 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대부분의 포르노 촬영은 내가 한 명 이상의 배우를 상대하는 촬영일 테니까,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건 여러 출연자가 몸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된 한 팀이 돼서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명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포르노를 찍는 건 파트너와 춤을 추는 거랑 비슷할 거예요.
상대와 호흡을 맞추고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작업이 흥겹고 쉬워지면서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이사칠은 그녀의 대답에 감동했다.
이 바닥에서 5년, 10년을 보낸 배우들 중에도
이사칠의 질문에 그렇게 깊이 있는 대답을 내놓을 배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가 버지니아에게 던진 질문은
포르노배우가 되고 싶다면서 그의 제작사에 지원서를 보내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화상 인터뷰 단계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 항상 던지는 거였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과 그에 따른 높은 성공 가능성을 강조하며
“자신”만을 내세우는 대답을 해대기 일쑤였다.
그러니 관점을 자신이 아닌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과 이룬 팀”으로 옮겨놓은 총체적 시각에서
포르노 작업을 바라보는 대답을 한 버지니아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녀가 내놓은 대답에서 인터넷에 떠있는 면접용 멘트 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령 그게 그렇게 얻은 영업용 멘트라 할지라도
그녀가 내놓은 대답의 대단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흔한 말처럼 여겨지는 말을 해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녀의 연기력이, 설득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니까.
그녀가 작품에 출연해 펼칠 연기가
시청자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실마리 비슷한 거니까.
이사칠은 LA에서 직접 만났으면 한다며 왕복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보냈다.
LA에 온 그녀를 만난 이사칠은
그의 경력에서 제일가는 “물건”을 건졌다는 짜릿함에 전율했다.
그녀는 이사칠이 화성으로 떠나면서 지구에 남기고 갈 “진정한 작품”이 될 재목인 게 확실했다.
마침 그 자리에 같이 있던 그레이스도 인정했다.
“카메라를 켜기만 하면 표정이 확 바뀌면서
카메라하고 케미스트리가 끝내주네요. 정말로 끝내주는 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