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픽사 스튜디오가 내놓은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업>은
영화가 시작하고 첫 10분 간과
그 뒤에 이어지는 부분의 내용과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른 특이한 작품이다.
많은 풍선을 매단 덕에 허공에 둥실 떠있는 집을 보여주는 포스터를 보고는
어느 정도의 허황한 설정과 전개를 통해
애니메이션 특유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기대를 저버리는 <업>의 처음 10분이 약간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10분 이후에 펼쳐지는 내용은 대단히 흡족했을 것이다.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업>의 첫 10분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떼어내도 될 정도의 기승전결과 빼어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파라다이스 폭포를 실제로 횡단했다는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다시 모험에 나섰다 실종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는 꼬맹이였던 칼은
같은 취향의 말괄량이 엘리를 만나 사귀던 끝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화는 칼과 엘리 부부가 품은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보겠다는 꿈을 현실생활이 번번이 좌절시키는 모습을,
그리고 부부를 낙담시키고 결국에는 이별하게 만드는 서글픈 인생사들을 보여준다.
살뜰하게 모은 여행 경비를 타이어 펑크 같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써버리는 모습은,
그리고 또 다른 냉혹한 현실이 꿈의 실현을 악착같이 방해하는 광경은
비슷한 경우를 적어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서민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자녀를 갖고 싶었던 두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걸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장면은,
그리고 칼보다 적극적이고 호탕했던 엘리가 여행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로
칼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심금을 울린다.
<업>은 그렇게 사실적이고 애틋한 10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장르”에 접어들면서
흥미진진하고 웃기는 데다 흐뭇한 감동까지 안겨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할 채비를 마친다.
엘리가 떠난 후,
칼은 엘리와 함께 정답게 가꾸며 살던 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칼의 각진 턱은 그가 완고한 노인네가 됐다는 것을 상징하는 특징이고,
그가 짚고 다니는 테니스공 끼운 지팡이는
그의 몸이 운신이 쉽지 않은 상태가 됐다는 걸 보여준다.
그의 집이 있는 구역에서 개발공사가 진행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알 박기에 나선 몹쓸 노인이 돼버린 그는
의도와는 달리 폭행사건의 가해자까지 돼버리자
어마어마하게 많은 풍선을 집에 매달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여행에 나서는데,
노인을 돌보는 임무를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보이스카우트 러셀도 엉겁결에 그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풍선으로 집을 띄울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규모의 집을 띄우려면
영화에서 사용된 것보다 1,300배 많은 풍선이 필요하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건 애니메이션이니까
영화에서 쓴 정도의 풍선으로도 남미로 여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인정하도록 하자.
1930년대나 40년대에 모험에 나섰다 실종된 먼츠가 기르는 개들이
목에 달린 특수 장치를 통해 사람의 말을 구사한다는 설정이나
1960년대나 70년대쯤에 사용했을 법한
디스플레이가 달린 위치추적기를 이용해
개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설정도 그러려니 받아들이자.
개들이 먼츠의 수발을 들며 식사까지 차리고 포도주를 따라주는 모습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도록 하자.
조금 또는 많이 무리한 설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
유쾌하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으니까.
테니스공에 환장하는 개들의 특성을 이용해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도 재미있고
비행선과 떠다니는 집과 전투기가 어우러지는 공중 활극도 아슬아슬한 재미를 안겨준다.
<업>은 첫 10분을 지난 이후는
애니메이션, 특히 픽사 애니메이션의 팬들이 기대하던 전형적인 영화가 된다.
<업>의 첫 10분과 이후의 나머지 부분은 성격이 완전히 딴판인 작품들이다.
두 부분의 분위기와 설정 측면의 격차가 어찌나 심한지,
뒷부분은 엘리를 떠나보낸 것에 상심하고 갖은 노환에 시달리던 칼이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자 스스로 빚어낸 흐뭇한 내용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도 두 부분은 피트 닥터와 밥 피터슨 공동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덕분에
하나의 작품으로 제대로 어우러진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아픔과 낙담,
그걸 이겨내는 용기와 그를 통한 성장을 빼어나게 보여주는 통일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업>을 보고 나면 이 영화에서 “집”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칼에게 집은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의 화신이다.
폭행사건의 발단이 됐던 우편물 수령함에 찍혀있는 손자국처럼
부부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집안에 있는 물건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끔찍이도 아끼던 그도
결국에는 집을 다시 허공에 띄워 사랑하는 사람과 동물들을 구하려고
엘리와 자신의 손때가 묻고 온갖 추억이 깃든 세간살이를 버린다.
중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그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과
그의 가슴에 오롯이 담겨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설정이다.
이 설정을 보며 떠오른 또 다른 영화가 있었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인 디 에어>로,
그 영화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조지 클루니는
틈날 때마다 “배낭에 넣어서 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연 우리에게 “집”은 어떤 곳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 곳일까?
엘리의 평생이 담겨있다시피 한 “나의 모험 책”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 보자.
갖가지 자질구레한 현실에 발목이 잡혀 모험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엘리가
그 책에 담은 것은 칼과 행복하게 지냈던 일상생활의 추억이었다.
결국 엘리는 “인생은 그 자체가 모험”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2025년 새해, 여러분의 인생이 즐겁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