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엄(广)
“집 엄(广)”은 “집”이나 “암자” 등의 뜻을 가진 글자로,
건축물과 관련이 있는 글자에 많이 쓰인다.
앞서 집을 가리키는 글자인 “집 면(宀)”을 살펴봤었는데,
“广”과 “宀”의 차이점은 집의 크기에 있다.
“宀”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집을 가리키는 반면,
“广”은 집 주위에 담벼락을 두를 정도로 상당히 큰 집을 가리킨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살펴볼 “广”이 가진 다른 뜻인 “넓다”는 뜻도 이 차이점에서 파생된 것이다.
“广”의 자원(字源)에 대한 설명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广”은 집을 가리키는 글자와 언덕을 나타내는 “기슭 엄(厂)”이 합쳐진 글자로,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집”을 가리키는 글자라는 설명이다.
“广”에 “까마득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암자(庵子)”라는 뜻이 생긴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广”은 “厂”과 혼용되기도 하는데,
“厂”의 경우는 “산이나 강의 기슭,” “언덕”의 모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상형자다.
“广”은 주거생활과 관련된 글자에서 무척 많이 볼 수 있다.
“广” 안에 “나무 목(木)”이 들어가면 “상 상(床)”이 된다.
이 “床”에 밥과 반찬을 올려놓으면 밥상이 되고,
책을 올려놓고 읽거나 공부를 하면 책상(冊床)이 된다.
예전에 마당이 있는 집은 마당에 평상(平床)을 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봄과 여름, 가을에 평상에서 놀다 훈훈한 바람이 끌어낸 잠기운을 이기지 못해
낮잠에 들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가끔씩 있다.
“广” 안에 바퀴 달린 수레나 마차를 가리키는 글자인 “수레 차(車)”를 들여놓으면
“창고,” “곳간”이라는 뜻을 가진 “곳집 고(庫)”가 된다.
“庫”라는 글자를 보면,
창고나 곳간은 기본적으로 바퀴 달린 수레가 들락거릴 정도의 규모가 되는 건물로,
수레에 실린 물건을 부려놓는 곳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정원(庭園)” 등의 단어에 쓰이는 “뜰 정(庭)”은
“广”과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논의하던 곳”인 “조정(朝廷)”을 가리키는
“조정 정(廷)”이 합쳐진 글자다.
“廷”에는 “조정”이라는 뜻 외에도 “앞마당,” “뜰”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뜻이 그대로 옮겨지면서 “庭”이 “뜰”이라는 뜻을 갖게 됐다.
“广”과 “점칠 점(占)”이 합쳐지면 “가게 점(店)”이 된다.
글자에 “占”이 들어가 있다고
“상점(商店)”이나 “본점(本店),” “지점(支店)” 등을
“점을 치는 공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에 들어간 “점”은 “점령(占領)하다,” “차지하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店”은 “시장의 한쪽 구석을 차지한 건축물”을 가리킨다.
앞서 “들을 청(聽)”을 다룬 글에서 “관청 청(廳)”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广”과 “聽”이 결합된 글자라는 점에서
관청은 “공공의 일을 하는 하인(公僕)들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현실의 관청이 “廳”이라는 글자를 만든 이들의 취지를
얼마나 잘 실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聽”은 조금 복잡한 글자라서 쓰는 데 시간이 걸리고 쓰다가 틀릴 여지도 많이 있다.
그래서 “廳”은 안에 들어있는 “聽” 대신에
간략하고 발음도 비슷한 “넷째 천간 정(丁)”을 집어넣은 약자인
“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잦다.
“순서,” “차례” 등을 가리키는 글자인 “차례 서(序)”는
“广”이 왜 들어간 것인지 의아해지는 글자다.
“广” 안에 들어간 글자인 “나 여(予)”인데,
“予”는 “序”에 “서”라는 발음을 주기 위해 들어간 글자일 뿐이라는 설명도 있고,
“予”가 “천을 짜는 직기”에서 생겨난 글자라는 점을 바탕으로
“천을 짜는 순서”와 관련한 의미를 갖게 됐다는 설명도 있다.
“온도(溫度),” “도수(度數)” 등의 단어에 쓰이는 “법도 도(度)”도
“广”이 들어간 연유가 궁금해지는 글자에 속한다.
앞서 “广”에 “넓다”는 뜻이 있다고 썼는데,
“广”과 “누를 황(黃)”이 결합돼 만들어진 글자인 “넓은 광(廣)”은
그 뜻을 고스란히 가진 글자다.
여기서 “黃”은 고대 중국을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황제(皇帝)인 “황제(黃帝)”를 가리키는 것으로,
“황제가 거주하는 넓은 집”에서 “넓다”는 뜻이 파생됐다.
개인적으로는 음양오행에서 노란색인 “黃”이 상징하는 방위가
동서남북의 한가운데인 “중앙(中央)”을 가리키기 때문에
중원(中原)의 너른 벌판에서 “넓다”는 뜻이 유추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