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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n 27. 2024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그린 북>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은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영화다.

피부색과 성격과 취향 등

많은 면에서 다른 두 인물이 여행길에 올라

갈등과 시련을 겪는 등 동고동락하는 동안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면서

여행에 나서기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된다는

전형적인 버드무비이자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전형적인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 <그린 북>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1962년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62년은

미국이 노예제 폐지 여부를 명분으로 내걸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1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인종에 관한 편견은

(특히 남부에) 끈덕지게 남아있다.

영화에는 흑인과 악수는 선뜻하면서도

같은 화장실을 쓰는 건 거부하는 백인이 등장한다.

그러고서 몇 년이 흐르면

미국의 백인들과 흑인들은

똑같은 군복 차림으로

머나먼 아시아의 정글을 함께 뒹구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왜 선입견을 갖는가?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선입견을 갖는 데에는

진화적인 이점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카너먼은 인간의 사고를

직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스템 1(빠른 사고, Thinking fast)과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시스템 2(느린 사고, Thinking slow)로

분류했다.

우리가 갖는 선입견은 “빠른 사고”에 해당하는데,

그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물체가 우리 눈앞에

불쑥 튀어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 물체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인지 여부를

충분한 시간을 갖고 판단한 후 행동하는 대신,

일단은 즉각적으로 몸을 피하고 보는 것이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런 식의 사고시스템은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많은 진화적 이점을 안겨줬지만,

인간은 그런 시스템을 택한 데 따른 대가도 치러야 했다.


인종에 대한 선입견도

이런 식으로 생겨나고 퍼졌을 것이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심도 깊은 “느린 사고”를 거치지 않은 채로

사회 전반에 퍼지고는

“빠른 사고”로 우리 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모두가, 심지어 차별을 당하는 이들 중 일부도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첫 면접을 할 때 셜리 박사는 토니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린 북>은

인종주의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을

180도 뒤집은 캐릭터 설정을 통해

인종주의의 부조리함과 극복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흑인인 셜리 박사는

많은 이들이 무의식 중에

백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생각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백인인 토니는 흑인과 결부되는 경우가 잦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두 캐릭터의 설정이 역전됐다는 것을

두 사람의 첫 면접 때부터 확연하게 보여준다.

셜리는 높은 자리에 앉아 토니를 내려다본다.


영화는 백인인

(그러나 백인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무시당하는 이탈리아계인)

“떠버리” 토니(비고 모텐슨)가

주먹도 잘 쓰고 잔머리도 잘 굴리는,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도입부에서부터 보여준다.
그는 흑인의 입이 닿은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좋아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바람에 백수가 되자

돈벌이를 위해 자신의 인종주의에 대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또는 속물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함께 부대끼며 인종주의의 벽을 넘는 두 사람


반면,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는

“편하게 연주하며 돈을 벌 수 있는”

북부에만 머무르는 대신

인종주의가 뼛속까지 스며든

남부로 투어를 다니는 “용감한” 흑인이다.

성채 같은 집에 살면서

법무부장관과 직접 통화할 수 있을 정도의 인맥을 가진

상류층 인사이기도 하다.


흑인이라면 누구나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하는 걸까?


두 사람은

흑인이 투숙하고 식사할 수 있는 시설들을 정리한

여행안내서 “그린 북”에 의존해

남부 투어를 다니는 동안

“흑인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불러온 코믹한 에피소드를 겪기도 하고

흑인은 일몰 후에는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법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투옥되는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8주간의 투어를 마칠 때쯤이면

두 사람은 고용주와 피고용자 관계를 넘어

친구지간이 돼있다.

마지막 순간,

셜리 박사는 운전대를 잡고 토니를 집에 데려다준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 있다.

토니가 도로에서 퍼진 차를 고치는 동안

뒷좌석에서 내린 셜리 박사가

들판에서 고되게 농사를 짓는 흑인들과 주고받는 시선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씁쓸함이 실려 있다.


폭력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자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장면은

토니가 YMCA에서 곤경에 처한 박사를

경찰들 손에서 꺼내온 뒤에 등장한다.

기존에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면

박사의 진실을 알고서는

박사를 대놓고 경멸할 것 같던 토니가

뜻밖에도 자신은

“예술가의 복잡한 세계”를 인정한다고 밝히는 장면 말이다.


피부색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인물이

성적 취향에 대한 선입견은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이 장면을 보면

우리가 가진 선입견은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라는 걸,

못된 선입견을 버리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토니처럼 셜리 박사와 동행하면서

부조리한 차별의 순간을 목격하고 같이 부대끼면,

차별받는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인종주의에 대한 “빠른 사고”를 “느린 사고”로 전환한다면

불합리한 선입견을 버릴 수 있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젠더, 국적, 연령, 출신지역 등

온갖 기준에 따른 선입견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고

그에 따른 멸시와 차별이 서슴없이 자행되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계기로 삼는 데

이 영화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장면이자

나 자신이 선입견을 가진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또 다른 장면은

뉴욕을 눈앞에 둔 순간에

교통경찰이 차를 세우라고 지시하며 시작되는 장면이다.

인종주의에 찌든 미국 각지의 경찰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를 영화 내내 본 결과,

우리는 은연중에 경찰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됐다.

이 장면을 보는 여러분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 그다음에 한 행동은

내가 은연중에 미국 경찰에 대한 선입견을 갖는 과정에 대해

곱씹어보는 계기가 됐다.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유명한 헤어 젤 장면.


영화를 보고 나서 반성한 또 다른 선입견도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피터 패럴리는

동생 바비 패럴리와 함께

“패럴리 형제”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유명 감독이었다.

형제가 내놓은 대표적인 작품은

<덤 앤 더머>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같은 코미디로,

“고상하다”는 표현하고는 까마득히 거리가 먼 영화들이다.

<메리>의 헤어 젤 장면은

지저분하기는 해도

정말로 웃기는 장면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린 북>의 감독이

“피터 패럴리”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가 “패럴리 형제”의 형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성(姓)이 같은 바람에

불운한 오해를 받아 애로사항이 많아진 감독일 거라며

딱하게 여기기까지 했었다.

이런 선입견을 가진 것에 대해 반성하는 바이다.


피터 패럴리의 연출작 <지상 최대 맥주배달 작전>.


그가 <그린 북> 다음에 만든 영화는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전선에 있는 친구들에게 고향의 맥주를 배달한다는

엉뚱한 임무에 나선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지상 최대 맥주배달 작전>이다.

이 영화 역시

“패럴리 형제”의 형에 대한 선입견이 그릇된 것임을

또다시 증명한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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