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의 극장판과 감독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해서 2005년에 극장에서 공개한
<킹덤 오브 헤븐>의 2시간 24분짜리 극장판은
12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운동과 예루살렘 공방전을 다룬
웅대한 규모의 수작이었지만
몇몇 설정과 배경은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된 듯한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러다 10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스콧 감독은 저주받은 극장 개봉판과 압도적인 상찬을 받은
여러 버전의 디렉터스컷을 낳은 전설적인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감독답게
<킹덤 오브 헤븐>의 3시간 10분(인터미션을 포함하면 3시간 14분) 짜리 감독판을 공개했고,
그러면서 이전에 모호하게 느껴졌던 부분들은
러닝 타임을 줄이는 과정에서 많은 장면을 삭제한 탓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극장 개봉판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지만, 감독판은 DVD와 블루레이로만 볼 수 있다).
극장 개봉판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고드프리(리암 니슨)가
아내의 자살 때문에 울적해하는 대장장이 발리앙(올랜도 블룸)의 대장간에 불쑥 나타나서는
다스 베이더처럼 뜬금없이 “내가 네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감독판에서는 발리앙의 아내가 자살한 이유와
고드프리가 어떤 사람이고 그와 발리앙의 어머니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뚜렷하게 설명해 준다.
발리앙이 아내의 목걸이를 슬쩍한 지역의 신부를
느닷없이 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장 개봉판과 달리,
감독판은 발리앙과 신부가 어떤 관계이고
발리앙의 살해가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극장 개봉판과 감독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나병에 걸린 보두앵 4세(에드워드 노튼)의 서거 이후 보두앵 5세로 등극하는
시빌라(에바 그린)의 아들을 보여주느냐 그렇지 않으냐 여부다.
극장 개봉판은 시빌라에게 이전 결혼에서 얻은 어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철저히 감추지만,
감독판은 그 아이와 관련된 장면들을 모두 보여주면서
시빌라의 고뇌와 보두앵 5세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동기와 행동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감독판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방전이 끝난 후
기 드 뤼지냥(마튼 초카스)이 등장해 발리앙과 결투하는 장면은
극장판을 보면서 궁금해했던 뤼지냥의 운명을 설명해 준다.
감독판에만 나오는 장면 중에는 영화에 성스러운 종교적 분위기를 불어넣는 장면도 있다.
발리앙이 황량한 사막에 있을 때 사막에 있던 초목이 저절로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이 그렇다.
건조한 기후에다 지하에 석유가 매장돼 있기에
그런 발화현상은 그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은 채로 그 광경만 지켜보노라면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갑작스레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부분이 모호한 극장 개봉판이건 배경과 동기를 뚜렷하게 제시하는 감독판이건,
<킹덤 오브 헤븐>이 발리앙 개인의 방황과 각성, 성장을 다룬 작품으로서도 뛰어난 작품이고
상반된 종교적 신념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이
예루살렘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전투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도 뛰어난 영화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영화가 시작됐을 때 발리앙은 아내와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대장장이였다.
곧이어 살인자 신세로 예루살렘으로 도망간 그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빼어난 지휘관으로서
살라딘(가산 마수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 백성들을 지켜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대장장이가 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권유하러 찾아온 리처드 1세의 권유에도
자신은 대장장이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 시점의 그는 영화가 시작됐을 때의 위축된 대장장이하고는 완전히 딴판인 대장장이다.
<킹덤 오브 헤븐>은 발리앙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작품의 진가는
발리앙의 편력과 장대한 규모의 전투신을 성공적으로 엮어내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투석기와 공성탑이 동원되고 화살이 빗발치며 불덩어리가 날아다니는 성벽 전투와
몸과 몸이 부딪치고 시뻘건 피가 튀기는 육박전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은
<글래디에이터>와 <블랙 호크 다운> 등의 영화에서
빼어난 액션 연출력을 보여준 바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출중한 내공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 영화가 역사를 충실히 재연한 것은 아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영화의 주제와 재미를 위해 실제 역사를 적절히 가공했기 때문에
실제 역사하고는 차이 나는 부분이 많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 영화에 묘사된 인물들과 사건들이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는지를 설명하는 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킹덤 오브 헤븐>이 역사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했느냐 여부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얼마나 확실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느냐 여부다.
영화 후반부에서 티베리어스(제레미 아이언스)는
기독교군과 이슬람군이 충돌하는 십자군 전쟁에서
“신은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영토와 재물”이라고 설명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윌리엄 모나한과 연출을 맡은 리들리 스콧이
21세기의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킹덤 오브 헤븐>의 이야기는 12세기에 끝난 게 아니라는 것,
전쟁을 주장하고 일으키는 자들이 진짜 목적을 가리고서 내세우는 허울에 속지 말고
진짜 목적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킹덤 오브 헤븐>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낳고 끝날 것인지를,
끝이 나기는 할 것인지조차도 알 길이 없는 중동 지역의 현재 정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그런 맥락에서, <킹덤 오브 헤븐>에는 찬찬히 곱씹어볼 만한 대사와 장면이 대단히 많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등장인물 각자의 판이한 시각이 반영된 대사들은
하나같이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고,
리들리 스콧이 유려한 솜씨로 담아낸 화면들도 대단히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은 것 중 하나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그 주위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난투를 포착한 부감신이다.
처음에는 밝은 햇빛 아래 벌어지는 전투를 포착한 것처럼 보이던 화면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대로 어두워지면서 어느샌가 전투가 마무리됐음을 보여준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화면을 어둡게 만드는 것으로 몇 시간의 시간이 경과됐음을 알리는
뛰어난 솜씨가 발휘된 장면이다.
이제 <킹덤 오브 헤븐>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얘기되는 장면이자
반드시 얘기해야 하는 장면 얘기를 해야겠다.
발리앙와 살라딘이 각자의 목숨과 명예를 걸고 유혈 낭자한 전투를 치른 끝에
협상을 벌여 합의에 도달한 직후의 장면 말이다.
발리앙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살라딘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자 몸을 돌린 살라딘은 대답한다.
“아무 가치도 없네(nothing).”
그러고서 자기 진영으로 향하던 살라딘은 다시 몸을 돌리고는 대답한다.
“모든 것이기도 하지(everything).”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서
나에게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가 모두 있는 곳인 예루살렘의 가치는
“nothing”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everything”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그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어마어마하게 큰 가치를 지닌 땅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큰 가치도 이 장면과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묘사되는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의 종교에 대한 관용, 신뢰”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