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만을 목표로 오르고 내달리는 최고의 오락영화

<엑시트>

by 윤철희

이상근 감독이 연출한 <엑시트>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액션과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유머로

관객에게 한껏 재미를 안겨주는 오락영화다.

오락영화를 만들려는 제작진이라면

하나하나 분석하고 장점들을 학습하는 데 몰두해야 할 교과서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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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는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엑시트>는 많은 사람이 밀집해 생활하는 도심 한복판에

유독성 가스가 퍼지는 끔찍한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발단으로

가스를 피해 고층으로 도망가는 등장인물들이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각각의 장애물들은 게임을 구성하는 스테이지들처럼 제시된다.

영화는 그런 스테이지들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으면서

게임의 마지막 단계인 “생존 성공”까지 질주에 질주를 거듭한다.

각종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겨가며 천신만고 끝에 최종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주인공들은

영웅으로 등극하는 데다 사랑까지 쟁취하는 보상을 받게 된다.


<엑시트>의 크나큰 장점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가 매끄럽고 재미있게 전개될 수 있도록 제 구실을 다한다.

칠순잔치가 끝나고 남은 술병을 백팩에 담아놓는다는 사소한 설정조차도

다급하게 백팩을 사용해야 하는 용남(조정석)의 시간을 빼앗는 장애물 노릇을 하면서

1분 1초가 아까운 용남과 관객의 조바심을 자아내는 요소로 활용된다.

이외에도 상품 홍보용 입간판과 아령 같은 자잘한 요소들이 틈날 때마다 등장해서는

관객에게 소소한 재미와 웃음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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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를 보면 CG 활용이 보편화된 시대에 액션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1923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코미디 <Safety Last>라는 영화는 모르더라도

고층빌딩 꼭대기의 시곗바늘을 붙잡고 매달려있는 해럴드 로이드(Harold Lloyd)의 모습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1세기 전에 그 영화를 만들 때조차도 관객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가 활용됐지만,

그래서 그 장면은 화면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안전하게 촬영됐지만,

그런 화면을 연출하는 트릭에 대한 정보가 없던 당시 관객들은

그 화면을 보며 엄청난 스릴을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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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관객들은 어떤가?

요즘의 웬만한 관객들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화면이

어떤 식의 CG 작업을 통해 작업된 것인지를 짐작하며 영화를 감상한다.

<엑시트>에서 용남이 옥상 문을 열기 위해

고층빌딩 외벽에 튀어나온 장식물들을 이용해 빌딩을 오를 때도,

용남과 의주(임윤아)가 카펫처럼 깔린 가스 위로 툭 튀어나온

좁고 경사진 지붕을 필사적으로 뛰어갈 때도

관객들은 까마득히 높은 것처럼 보이는 빌딩의 대부분과

짙은 안개처럼 보이는 가스가 사실은 CG로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배우들은 무척이나 안전한 환경에서

치명적인 위기에 몰린 척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 액션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의 연출력은

빠삭한 정보를 가진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는데,

이상근 감독은 용남이 움켜쥔 빌딩 외벽 사자 조각상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등의 장면에서

관객이 움찔거리며 탄성을 내뱉게 만드는 빼어난 연출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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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에게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제 효과를 드러낸 곳을

<엑시트>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엑시트>의 시나리오까지 직접 집필한 감독은

주인공들이 가스를 피해 줄곧 높은 곳으로만 오르게 만들지 않는다.

초반과 중반까지 수직선을 타고 올라가는 미션을 수행해야 했던 주인공들은

후반에는 가장 높은 곳인 타워크레인에 간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수평선을 따라 질주하는 미션을 부여받는다.

그 결과, 중력을 이겨내며 높은 곳으로 가려 안간힘을 다하는 주인공들에게 공감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관객들은

주인공들 곁에서 함께 날아가는 드론들처럼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가르며 이동하는 속도감을 만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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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석과 임윤아, 여러 조연의 뛰어난 연기도 영화의 재미를 증폭시킨다.

<엑시트>의 출연진은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할 법한 캐릭터들을 조금도 튀지 않게 연기해 낸다.

조정석이 탁월하게 연기해 낸 용남 캐릭터는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킨 “<건축학개론>의 납득이”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됐을지도 모르는 지질한 루저 캐릭터다.

구조 헬리콥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떠나보내고는 뒤돌아서서

“고객이 먼저인 게 당연하다”라고 의연한 척하며 울먹이는 임윤아의 연기도

관객의 웃음과 공감을 함께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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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단점이 없지는 않다.

치명적인 가스 때문에,

그리고 2차적으로 발생한 교통사고와 폭발 때문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엑시트>에서 가스 확산 사고는

영화 내내 끊임없이 위기를 조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요소일 뿐이다.


가스 테러를 가볍게 다룬다는 비판은 정당하다고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엑시트>는 시종일관 관객을 즐겁게 해 주려는 데 몰두하는 오락영화다.

오로지 그 목표 하나에만 집중하는 영화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옥상에 놔두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구조대의 행태를 비판하지도 않고

테러의 발단이 된 화학회사의 경영 행태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엑시트>에 중요한 것은

위기를 맞은 주인공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며 행복을 쟁취하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이 알 필요가 없는 가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오락영화에서는

그 가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부정적인 효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주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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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형식으로 구성된 <엑시트>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 주인공들이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또 다른 장애물을,

그것도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앞서 제시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장애물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엑시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도

기발한 설정을 통해 주인공들을 생각지도 못한 위기로 몰아넣는 장면이다.

헬스장에 도착한 용남과 의주는 로프를 묶은 아령을 이용해 건너편 건물 옥상으로 넘어가려 한다.

먼저 로프를 타고 넘어가는 데 성공한 의주가

용남에게 빨리 건너오라고 재촉하는 순간

아래층에 있는 고깃집에 가스가 차오르고,

고깃집의 연기 흡입장치는 가스를 빨아들여 옥상에 내뱉어서는 두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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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엑시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을 재치 있게 활용하는 빼어난 오락영화다.

위중한 재난 발생과 대처 역량 같은 심각한 요소들은

그런 주제에 몰두하는 다른 영화에 맡겨두도록 하자.

때로는 그저 <엑시트> 같은 영화의 재미에 흠뻑 빠져드는 것도

위기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잠시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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