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아버지(4)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는 늘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끔 잔뜩 쌓인 채 채점을 하지 않은 학습지를 봐줄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틀린 문제에 크게 엑스 표를 쓰는 엄마랑 달랐다. 아버지는 항상 틀린 문제에 아주 작게 엑스를, 맞춘 문제에는 아주 크게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그러면 동그라미가 풍선처럼 맘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진짜 지상에 남편이 없는 여자와 땅 위에 아버지가 없는 남매가 나란히 걷는다. 이제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우리 관계는 채점을 해 줄 사람이 없는 학습지 같았다. 아버지라면 우리를 어떻게 채점을 할지 생각하면서 엄마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누나와 나, 그리고 엄마는 눈이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엄마가 아버지의 시신기증 절차를 자기 맘대로 처리한 후, 3년간 우리는 계속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해본 기간이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었나? 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를 직접 생각하고 느낀 적이 없었더라. 엄마의 평가대로, 엄마의 시선대로, 엄마가 대하는 그대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었다.
'지지리 남편 복이 없어서 지지리 자식 복도 없는 엄마'는 계속해서 니들은 나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를 밟아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를 무능하고 나쁜 사람으로 물아 세우고, 너무 부족한 아버지와 덩달아 모자란 자식들을 위해 자기가 있어야 한다고 포악을 해댄 것 같다. 어쩌면 오랜 시간, 누구의 욕망 때문에 시작된 건지도 모르는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르겠단 깨침을 얻은 것도 3년의 장례식 동안이었다. 그리고 심리상담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시기였다.
"아버지.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채점해 줄래요?"
엄마는 나쁜 사람인가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가스라이팅을 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의지하는 불쌍한 중생인가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어떤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 엄마는 '무능함'이라고 폄하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정말 아버지는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핀잔을 줄 때 마다 머쓱하게 웃을 때 주름이 많았던 눈가와 말끔했던 이빨을 좀 더 자주 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볕과 같은 아버지에게 곁을 주지 않은 건 바로 나 자신이었더라.
아버지라면 우리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고 우리 세 사람에게 세상 가장 큰 동그라미를 그려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도 빨간 동그라미 하나를 하늘을 향해 그려보았다. 아주 커다랗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