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Jan 24. 2024

기억 상실과 상실의 기억, 그 사이

노아 바움벡의 '결혼이야기' 리뷰

'결혼이야기' 스틸컷

결혼을 하면 미래와 더 가까워질 것 같지만, 사실 각자 과거의 시간과 더 친밀해지는 순간이 많아진다. 미래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시간이 이어지다 보면 마음이 자꾸 쿵, 과거라는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때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상대방이 세상 전부인 것 같았던 시간은 희미해지고,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저 사람이 없었다면 달라졌을 내 시간, 그 시간의 온전한 주인이었을 나 자신을 자꾸 되짚다 보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시간 속, 설레었던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고 싶어진다.


시간기억상실

사람들의 기억은 꽤 이기적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이해한 기억과 오롯한 자신의 감정만을 시간 속에 새긴다. 그래서 과거를 함께 되짚어 가다가 당황하게 된다. 과거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이야기’는 각자의 감정을 저울질하느라 상대에 대한 진심이 뭔지 들여다 볼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남자와 여자의 쓸쓸한 시간을 되짚는다. 

뉴욕에서 촉망받는 연극 연출과 배우로 살아왔지만, 이혼을 결심한 후 아내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LA에서 TV 시리즈로 복귀하고 남편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뉴욕에 남아 연극 연출가로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결혼이야기’는 영화와 연극이라는 매체의 차이만큼 다른, LA와 뉴욕의 온도만큼이나 다른 여성과 남성, 그 생각이 다른 연출과 배우, 기억이 다른 아내와 남편을 관찰한다. 

‘결혼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혼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매력은 이러한 배반적 정서에 있다. 노아 바움백은 결혼과 이혼이 각자의 대척점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혼 역시 결혼이야기 속 일부이며, 이혼이 결혼의 종지부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단절된 시간과 공간, 그 속의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두 사람을 결별하지만 또 완전히 헤어지지는 않는다. 

노아 바움백은 한 지붕 아래, 같은 미래를 꿈꾸는 부부에서 각기 다른 하늘 아래 각자의 삶을 되찾으려는 남자와 여자를 바라본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구심점을 두고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만나지 못한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이야기라 꽤 많은 회상이 끼어들 법도 한데, 노아 바움백은 가급적 감상과 추억의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고 담담하게 이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찰리를 따라 뉴욕에서 살던 니콜은 고향인 LA로 돌아와 원래 자신의 삶을 찾고, 뉴욕과 LA를 오가야 하는 찰리는 니콜이 겪었던 균열과 불안함을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되짚어 겪는다.  

사랑했던 기억은 사라졌고, 불안한 현재 속에 두 사람의 시간은 뉴욕과 LA의 거리와 날씨만큼이나 다르게 흘러간다. 각자 다른 기억과 바람은 빈틈이 되어, 삶의 공허함을 키워간다. 그리고 사랑의 기억은 뚝 멈춰서는 순간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놀이기구처럼 삶에 균열을 만든다. 같은 시간을 지나고 공유하면 함께 있는 거라 생각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는 각자의 기억과 태도는 두 사람을 다시 갈라놓는다.


거리상실의 기억

영화의 도입부, 컨설턴트는 이혼을 중재하기 위해 각자의 장점들을 기록하고 그것을 읽어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제법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자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 이혼 소송이 격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태도는 달라진다. 소송에서 각자 유리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서로의 단점과 자신의 불행을 끊임없이 나열해야 한다. 각자의 장점을 떠올리던 아내와 남편은 각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상대방이 얼마나 자격이 없는 나쁜 사람인지를 계속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패악에 가까운 다툼 사이에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그 만큼의 배려는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싶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지만, 가치 없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할 만큼 서로를 미워하진 않는다. 어느 순간 어긋나버리긴 했지만, 상대방이 내 인생의 최악은 아니다. 한때 사랑했고, 한때 모든 것을 걸었고, 또 한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연민과 또 그 만큼의 증오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남편이 자신보다 더 잘 나간다고 생각하는 니콜은 영화배우로서의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찰리의 영감을 자극하는 뮤즈가 된 자신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반면 찰리는 니콜이 자신을 통해 그저 그런 영화배우에서 반짝이는 배우가 되었다고 믿는다. 착각과 오해 속에서 이별은 평행선이 되어 나란히 걷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했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상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내 쓸쓸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다. 남녀의 이야기도 현재 속에서, 그 결혼이 끝나는 과정도 현재 속에서 바라본다.  

가끔은 마음을 되돌리며, 서로를 잡아달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끝내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와 남편은 이혼소송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서로를 공격한다. 죄의식과 후회 사이의 줄다리기가 끝난 후 남은 것이 상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민과 이해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각자의 기억이 달라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지나간다. ‘결혼이야기’는 최악의 말들을 내뱉은 후, 스스로 외면한 상대방의 마음을 서로 바라보며 각자의 시간을 화해시킨다. 결혼 생활이 끝났지만, 그 관계는 끝나지 않은 현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미래를 남겨둔다. 

이혼한 뒤, 자식을 함께 양육하는 방식을 통해 니콜과 찰리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로 서로의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는 과거의 남편을 위해 풀린 운동화 끈 정도는 묶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노아 바움백은 해피엔딩을 위장하는 흔한 방식 대신, 각자의 시간을 따라 두 갈래로 나뉜 두 개의 삶이 그래도 이어지는 현재를 응원한다. 사랑을 잊고, 상실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한 위안은 없을 듯하다. 


명대사 

“형사 변호사들은 악당의 가장 좋은 점을 보고, 이혼 변호사는 착한 사람의 최악을 본다고 하잖아요.”


결혼이야기 Marriage Story(2019)

•감독 : 노아 바움백

•출연 : 스칼릿 요한슨(니콜 역), 아담 드라이버(찰리 역)

•국내개봉일 : 2019.11.27

•관객수 : 2만4천명

•볼 수 있는 곳 : 넷플릭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이전 02화 버린 후에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